오리, 나의 집에 장기 투숙하고 있는 강아지.
한번은 오리가 발사된적이 있었다. 그렇다. '대포 발사' 할때의 그 '발사'이다. 이게 듣기에 따라 학대정황이 의심되겠지만, 알고보면 우리가 놈을 학대한것이 아니라 놈이 우리를 학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개인 취향으로 평소 눈독 들이던 빨간소파를 집에 들여놓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 그러니까 오리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여느 주말처럼 남편과 내가 소파에 딱 붙어앉아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리가 그꼴을 차마 보지 못하고 느닷없이 우리에게 어슬렁 어슬렁 다가왔다. "당신들 좀 떨어져 앉아. 내가 새중간에 꼭 좀 누워야겠으니까" 하고 진지하게 말씀 건네셨고 그렇게 우리는 정중히 자리를 내어 드리게 되었다. 집에 '마약방석'을 비롯하여 우리가 사 바친 온갖 핫하다는 개방석이 도처에 널리고 널렸는데, 왜 구태여 그 사이에 기어 들어오겠다며 패악질인건지 나는 이해할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별수 있는가. 고명하신 대왕대비께서 그리 하시겠다는데 어디 무수리 따위가 감히.....
우리는 오리를 들어올려 남편과 나 사이 중간자리에 테트리스처럼 끼워넣고 다시 TV시청에 열중하고 있었다. 한 이십분쯤 지났을까. 별안간 잠을 자던 오리가 사라져 버렸다....... 그렇다. 눈 깜짝할 사이에 소파에서 증발해버린 것이다. 감쪽같이. 무슨 마술도 아니고 낮잠 잘 자고 있던 개가 갑자기 왜 사라졌을까. 뭐지? 버뮤다 삼각지야?
오리가 발사되었던 것이다. 퓨웅~. 자다 웬 날벼락이었을까. 잘 자던 오리가 갑자기 앞으로 '슈웅~' 하고 날아가더니 잠시 우리와 눈을 마주친뒤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런 광경은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가 그 당시 보고 있던 TV프로는 분명 애절한 멜로 드라마였는데, 갑자기 순간적으로 채널이 바뀌기라도 한듯, 명랑 만화 영화에서나 볼법한 전설적인 장면이 우리 눈앞에 리얼로 펼쳐진것이다.
어. 머. 나.
어찌된 일인지 우리 둘은 곧장 오리에게로 달려가지 못했다. '내가 뭘 본거지.....' 너무 놀란 나머지, 잠시 정지화면 상태로 사태를 파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치기어린 퍼포먼스라 여기기엔 오리는 너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장소를 가리지 않고 추태를 부리던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뭔가가 달랐다. 이 또한 빨간 소파의 저주인 것인가. 이 뻘건 물건에 마가 껴 있음을 짐작하고도 본전 생각 때문에 진즉에 내다버리지 못한 댓가를 지금 치루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오리에게 달려 갔을때에는 오리도 몹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뼈라도 부러진건 아닌지 우리는 걱정에 휩싸여 이리저리 샅샅이 살폈다. 괜찮으시냐 연신 캐물었으나 녀석은 어벙벙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자다가 갑자기 뒷다리에 힘이 들어간 것이다. 사람이 가끔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며 누운채로 파닥거리듯, 개들의 세계에도 뭐 그 비슷한게 있는 모양이다. 약관의 한 젊은 개가 멀쩡히 잘 자다가, 저도 모르게 갑자기 뒷다리로 소파 등받이를 힘껏 찼고, 그 바람에 당연히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말그대로 피스톨처럼 발사된것이다. 놀랍게도 젊은 오리는 꽤 멀리까지 날아갔다. 난데없이 대포에서 뿜어져 나가는 개포탄이 된것이다. 오로지 오리의 '젊음'이, 이 독창적인 퍼포먼스를 연출해낸 주범이었던 것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튼실한 뒷다리근육을 자랑하던 시기의 오리였다. (열다섯살에 트리플 악셀이 가능한 개이니, 소싯적엔 어땠겠는가(머리꼭대기 6화 '트리플 악셀'편 참조))
진짜로 어이없는 상황은 그 뒤부터였다. 제대로 잠이 깨어버린 오리는, 상황이 어느정도 파악이 되고부터 몹시 수치스러워 했다. 개를 키워본 사람은 알것이다. 개나 고양이도 '쪽팔린' 장면을 남에게 들키거나 하면 몹시 수치스러운 기색을 드러낸다는것을. 그래서 그런 장면을 목격했더라도 얼른 고개를 돌리고 못본척을 해주는게 매너이건만. 불행히도 그걸 몰랐던 우리부부는 오리의 무사함을 확인한뒤 "와하하하!" 둘다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오리앞에서 배꼽이 빠져라 박장대소를 해대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던 것이다. (오 마이갓.) 무지의 소치였다. 어리석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야 만 그 이후, 우리에게 무슨일이 일어났을것 같은가.
오리는 마치 제 뒷다리가 범인일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개처럼 우릴 범인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잠정 결론을 내린게 분명했다. 경멸에 찬 놈의 눈빛이 모든걸 말하고 있었다. 그녀석의 심중에는 이미 우리가 저지른 추악한 범행인 것으로 낙찰되어 있었다. 이 자식은 우릴 단단히 오해한 나머지, 우리 둘이서 잠든 제몸을 밀쳐낸게 아니냐는 듯 적반하장의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 신통치 않은 전개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의아했는지는 말할것도 없지만, 놈이 곤하게 자던 중 일어난 일이니만큼 오해를 할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갈수록 이 녀석, 우리 둘의 공모를 향한 혐의의 눈초리가 점점 강해지더니, 결국 상황은 그날 저녁밥을 거부하는 사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밥을 거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는데... "크르르르~~~~" 어라? 으르렁대며 적개심을 만땅 드러내는 녀석앞에서 우린 너무 어이가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호된꼴을 당해야 한다고? 놈의 태도는 확고부동했다. 마치 이건 개한테 까닭없이 학대를 당하는 느낌이었다. 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진짜 너무 억울했다. 세상사에 관한 오리의 시각이 이토록 부정적인 것에 관해, 뭔가 대책이 시급해 보였다. 하긴........ 무식하게 개 앞에서 둘이 그렇게 미친듯이 웃어댔으니....
나중에 서서히 깨달은 사실이지만, 짐작컨데 오리가 창피함을 무마하기 위해 그런 반응을 보였을 가능성이 컸다. 추운 겨울날 빙판에서 미끄러져 대자로 넘어진 사람이, 곁에 있던 친구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는 상황과 엇비슷하다. 오리가 무안한 나머지 느닷없이 방향을 전환하여 애꿎은 우릴 화풀이 대상으로 삼은 것이 분명했다. 흠...일리가 있다. 물론 우리가 자고 있는 저를 밀쳤을거라는 혐의를 완전히 거두지는 못했겠지만, 우리가 저한테 여태 해바치고 산 세월이 있는데 그 오랜 맥락을 영 무시해 치우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짜아식 무안해서 그랬구나....
"아니 개가 얼마나 창피했겠어! 그 앞에서 지붕이 떠나가도록 웃고 난리를 쳤으니! 그러고도 자기가 주인이얏??? " 우리 부부는 뒤늦게 서로를 맹비난하면서도 봇물처럼 계속 터져나오는 웃음을 좀처럼 멈출수 없었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란 서로간에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가 그날 목격한것은 가히 몸개그의 진수라 할수 있을만한 가치를 지닌 진귀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오리는 아름다웠던 것이다.
오리가 낙하했던 곳은 다행히 푹신한 매트가 깔려있었고, 먹성 좋은 오리도 살집이 올라 제법 탄력있는 '방댕이'를 자랑하던 시기였으므로 걱정할 만한 부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퉁'하고 뚝 떨어질때 나던 소리를, 그 뒤로도 우리 둘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방으로 발사된 뒤 바닥으로 수직 낙하하기 0.5초전, 슬로우 모션으로 우리와 잠시 눈을 마주쳤던 순간의 그 아련한 오리의 눈빛. 공중에 뜬채로 우릴 바라보던 그 애절한 눈빛은 죽을때까지 영원히 잊지 못할것 같다. 이 미친 '클리셰'를 현실에서 목격하다니. 녀석에게 그 억울하고 호된 취급을 당하고도 우리는 그날일만 떠올리면 여전히 먹던 것을 뿜는다. 푸핫. 그날 오리가 연출해낸 독창적인 퍼포먼스는, 우울한 날이면 잠시 시름을 잊게 해줄 강력한 '짤'이자 '밈'인 것이다. 가여운 오리. 이대로 영원히 고통받게 되는 것인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오리가 몸으로 그렸던 그날의 아름다운 궤적은, 우리부부의 머릿속에 고이 간직된 채 결코 사라지지 않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