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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컴온 베이비

by 스티키 노트
(제목: 컴 온 베이비)--아크릴 물감 아저씨가 뭘하든 애정과 염려의 눈빛으로 한곳만 바라본다.

이 갈색털의 스토커가 오직 한사람만을 줄창 바라보고 집착을 보이는데에는, 필시 이 스토커견의 죽어라 결여된 사회성이 한몫을 하는것일테지만, 그 이전에 뭔가 구슬픈 사연이 숨어있을 가능성도 간과할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뼈아픈 과거가 그 배경에 좌악 깔려있을 공산이 큰것이다. 우릴 만나기 전 오리에게 무슨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알길은 없지만, 추정컨데 모종의 학대가 우리 오리를 괴롭혔을수도 있고, 인간에 의해 빚어진 뼛골 빠지는 기억이 오리의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를 남겼을수도 있다.


어쨌거나 아저씨를 향한 오리의 징한 집착을 보고도 그 결여된 사회성을 만회시켜주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는 커녕, 그 집착을 대환영하며 만끽하고있는 저 생각없는 내 남편이라는 자의 만행을 보라. 입이 귀에 걸리고도 남을 저 함박웃음을 보라. 그 꾸준한 어이없음을 목도하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나려고 한다.


그 어디에도 한눈을 팔지않고 오롯이 한곳만 바라본다는 것. 지구상에서 오직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충성을 맹세한다는것은 '사랑'이전에 질병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오리가 산책을 하다 마주치는 어린아이들의 접근과 경계없는 손길에 대해, 적개심을 아낌없이 후하게 드러내곤 하는것을 자주 보기 때문이다. 이자식의 생각없음 앞에서 당황한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제 아무리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오는 손길에 대한 거부감이라 해도, 어떤 부모가 내아이에게 으르렁대며 이빨을 드러내는 개에 대해 관용을 발휘할수 있겠는가. 오리에게 큰 사람이 돼라 내 그리 누누히 일렀건만. 사랑이라는 이름의 이 배타적인 고리안에서 시건방을 떨고있는 나의 개 아니 내 남편의 개를, 내가 무슨 수로 가르치고 교화시킨담. 십삼년이란 시간동안 골빠지게 인류애에 관해 가르쳐왔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이 철딱서니 없는 독불장군 같으니. 오리는 아저씨라는 엄청난 배경을 등에 업고 세상을 향해 현란한 레이저쇼를 펼치고 있으니, 접근하는자 그 누구라도 오리의 눈에서 마구 발사되는 자비없는 레이저에 기가 질릴수 밖에. 오리에게 있어 '아저씨'라는 존재는, 호랑이처럼 전능하고 태양빛처럼 찬란한 존재인 것이다. 아저씨를 백그라운드로 두고 그의 총애를 누리고 있는 한, 오리에게는 더 이상 무서울것도 서러울것도 없는 세상인 것이다.


이제와, 인간 친화적인 개로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며 새삼 다시금 시동을 거는일은 별 의미가 없다는걸 나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 개가 남은 견생을 비좁고 편협한 견해에 갇힌 채 살도록 내버려 둘수도 없는 법. 오직 아저씨만을 기다리며 세상을 향해 패악을 부릴게 뻔하지 않은가. 그런 오리를 일깨우지 못한다면, 오리와 살고있는 우리 부부의 다소 암울한 미래 또한 불을 보듯 뻔하다. 이제라도 다시금 교화를 시도해봐야 하나? 나는 이 망하고도 남을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지 말지 찐하게 갈등중이다. 내가 오랜 은둔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치고 있는 이유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내가 폐쇄적 인생을 살고 있는한, 오리에게서 그 이상을 기대할순 없다. 이제는 나도 오리를 데리고 반려견 출입가능 식당이나 카페에도 좀 들어가보고 싶고, 함께 여행도 떠나보고 싶은데다가, 다른 개아범 개어멈들과도 두런두런 좀 어울려보고 싶다. 하아.... 집에 개를 들이고부터 여행다운 여행을 해본게 언젠지 모르겠다. 수험생이 수학을 포기하듯 여행을 포기한 삶이란 여간 허전한 것이 아니다. 여행 한번을 못 다니고 살면서, 무슨 앙꼬 빠진 찐빵처럼 무미건조함이 온몸을 감쌀때, 아무것도 모르고 옆에서 느물거리고 있는 이 견생을 보고 있노라면 살짝 울화통이 터지려고 한다. 내인생 돌려놔라 이 녀석아.

근드르즈 므르~!

그러나 오리는 전~혀 그럴 의향이 없다. 이 불통 노견의 확고부동한 신념을 보아라. 연로하신 오리님께서 오직 바라시는건 이대로 살다 죽게 '냅두라'는 그 한가지인것이다. 열다섯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빨도 개튼튼하고 시력도 나보다 월등히 나으며 후각과 운동능력도 탁월하신 양반이, 만사 귀찮은 티를 팍팍내며 매사를 뭉개기 바쁘시다. 내가 뭐만 좀 하자고 하면 사악한 눈깔을 한껏 야리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드신다. 지금으로선 그나마 '조촐한 산책길' 하나만 확실히 사수할수 있어도 감지덕지해야할 판인것이다.


그래. 모두의 만류대로, 어쩌면 다 내려놓고 '개편한' 노후를 보장해주는것이 맞는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둘, 이렇게 함께 늙어가는 처지에 피차 상황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 주는것이 현명할수도 있다. 그 나이에도 요렇게나 청순한 노견께서,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오매불망 한 남자만 질기게 바라보다 여생을 마무리 하겠노라 하시지 않은가. 이토록 굳은 결심을 토로하시는데 존중 못할것도 없다. 다만 그 배타적 고리안에 이 주방아줌마도 좀 끼워주고 함께 노닥거려준다면, 그쯤에서 하늘이 내린 복으로 알고 자족하며 살 생각이다. '사회성 회복' 이네 어쩌네 하다가 막판에 개인적인 사심을 드러낸것이 좀 아차 싶고 상당히 찝찝하긴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나의 간절한 진심을 저 꼬장꼬장한 노인분께 전달할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요컨대, 인류애적 차원으로다가 나랑도 좀 놀아달란 그 말씀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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