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 보면, 아저씨의 눈부신 얼굴이 그곳에 있다. 지금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요녀석을 어떻게 주물러 터트린담' 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보고 서있다. 나를 보며 빙구처럼 벙긋벙긋 웃는다. 나는 아저씨의 저 표정을 정말이지 좋아한다. 나무랄데 없이 천진한 저 표정을 가만히 응시 하노라면, 애정을 가늠해볼수 있어 마음이 놓이고, 영원토록 변절치 않으리라는 약속처럼 느껴진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이제 잠시만 기다리면 아저씨의 얼굴이 엘리베이터처럼 내게로 슈웅 내려올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나의 차갑고 축축한 코에 자기콧등을 갖다대고 두어번 문지른뒤, 두손으로 나를 번쩍 안아 올릴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저녁 서로를 환영하며 장구하게 치루어온 의식이자, 넘치는 환희이며, 종일토록 그리움을 온전히 참아낸 보상의 수순이다. 아저씨는 조금 전, 저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나는 저녁 내내 현관 앞에서 귀가하는 아저씨를 기다렸고, 오늘 아저씨는 사냥이 순조롭지 않았는지 다른날보다 조금 늦게 집에 왔다. 아니 나에게 왔다. 나를 안은 아저씨에게서 희미한 바깥세상의 냄새가 묻어 들어왔다.
바깥세상은 무시무시하다. 재미를 들이기엔 너무 가혹한 곳이다. 나는 한때 저곳에 버려졌었고, 그러느라 내 세상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렸었다. 그때 기억이 너무 혹독했던 나머지, 아줌마가 매일 나를 이끌고 산책을 나가려고 할때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오금이 저린다. 이건 좀 창피한 얘기지만, 너무 무서워서 오줌을 지린적도 몇번 있다. 그만큼, 떠올리는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한 기억들이 저 바깥세상에는 우글우글하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틈만나면 바깥에 나가고 싶어하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긴 있었다. 바깥 세상에는 뭔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냄새가 이곳저곳에서 잔뜩 피어나고, 내 삶에 활기를 불어넣는 볼거리가 넘쳐났다. 나같은 개들에게는 숙명과도 같은 유혹거리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아무것도 모른채 바깥이 마냥 좋기만 했던 그때 어린 시절을 한번 떠올려 볼까? 내가 아장대던 시절, 펫샵에 갇혀있던 나를 처음 집으로 데리고 가, 사랑한다는 말을 숨쉬듯 해주며 나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나를 끔찍히 예뻐했고, 인형놀이하듯 매일 옷을 갈아입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자그마하고 어린 내몸을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만 마주치면 사랑한다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의 작고 여린 세상은 그녀만의 것이었고, 그녀의 세상도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눈부신 환희였고, 서로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와 함께 머물고 싶어했고, 잘때도 몇번이나 깨어서 내가 별탈없이 잘 자는지 배고프지는 않는지 나를 살펴주었다. 우린 언제나 함께였다. 그녀는 편의점에 갈때나 쓰레기를 버리려 나갈때도 나를 데리고 나갔고, 심지어 친구들을 만나러 갈때조차 나를 품속에 소중히 안고 갔다. 너무 어려서부터의 일이었기에 나는 내가 이쁨받는게 당연한 일인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몸집이 부풀고 더이상 아장거리지 않기 시작할 무렵부터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날 성가셔하기 시작했다. 난 그전보다 훨씬 더 큰소리로 우렁차게 짖을수도 있고, 원기왕성 했으며, 전과는 비교할수도 없을만큼 높은곳을 멋지게 뛰어 오를수도 있게 되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더이상 날 향해 환하게 웃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예전만큼 날 쳐다봐주지 않는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어찌할바를 몰랐다.
하루는 내가 실수로 침대위에 토하는 바람에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낸적이 있다. 새하얀 이불과 시트와 패드는 줄줄이 세탁기로 들어갔고 그 이후로 그녀는 나만보면 뭔가를 중얼대며 투덜거렸다. 뭔가 나로 인해 그녀의 마음이 들쑤셔진게 분명했다. 내 잘못이었다. 공복이 길어질때마다 나는 노란물을 토해내고는 했는데, 이불에다 토하든 바닥에다 토하든 주인은 한결같이 투덜거렸다. 귀찮아하는 느낌이 역력했고 그또한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주인의 마음을 더이상 거스르지 않기위해 소동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썼으며, 똥 오줌만이라도 정해진 곳에 누려고 노력했다. 그녀에게서 티끌만한 관심이라도 얻어낼수만 있다면 난 무엇이든 했을것이다. 그런데 토기가 갑자기 올라오면, 속이 뒤집어지고 몸이 너무 힘들어 자리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몇번이고 앉은 자리에서 토할수 밖에 없었던건 나의 결정적인 실수였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결국 그녀에게서 버림받았다. 영원히 분리된 것이다. 모든일은 내가 방심한 틈에 벌어지고 말았다. 그동안 눈 밖에 나지 않으려 그토록 궁리하고 발버둥 쳤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낯선곳을 혼자 헤메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도 추앙하던 주인으로 인해, 내가 그렇게도 열광하던 바깥세상으로 내쳐졌던 것이다. 내가 아장대던 어린시절엔, 눈만 마주치면 사랑한다고 노래를 불러주던 주인이었다. 그녀는 갈색 털이 곱슬거리던 내 작은 머리통에, 뽀뽀 퍼붓기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바깥세상은 알고보니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내가 평소 알고 있던 그 설렘설렘한 세상이 아니었다. 그녀가 함께하지 않은 바깥세상이란 그저 험악하기만한 정글이었다. 쌩쌩 달리는 차는 맹수처럼 사나웠고, 사람들의 눈초리도 무서웠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들이 가장 가혹했다. 그들은 꼭 손에 뭔가를 움켜쥐고서 무리를 지어 나를 우르르 쫒아왔다. 추격은 무섭도록 끈질겼고, 겨우겨우 지탱하던 내 남은 기운마저 모조리 바닥내버리기에 충분했다. 혼이 달아날만큼 공포스럽고 허기에 시달렸지만 어디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녀가 후회와 함께 울며불며 애타게 날 찾고 있을것만 같아서, 나도 열심히 그녀를 찾아 사방을 헤메고 돌아다녔지만 그녀는 그 어느곳에도 없었다. 내가 홀로 그녀를 찾아 혼비백산 헤메었던 그 몇주동안, 나는 이루 헤아릴수 없는 부침을 겪었다. 개로 태어나 겪을수 있는 온갖 험악한 일을 모조리 경험했던 그 기간과 그 당시의 참담한 기분을 나는 죽을때까지 잊지 못할것만 같다.
그나저나, 아저씨가 하루종일 바깥에 나가 있는게 나는 항상 걱정이다. 내도록 걱정이 떠나질 않는다. 종일 쫑곳 안테나를 세워 보지만 아저씨가 바깥 어디에 있는지 나는 감도 못잡겠다. 아줌마는 대충 알고있는것 같은데 표정이 나쁘지 않은걸 보니 적어도 아저씨가 위험한 곳에 있는것 같지는 않다. 아저씨가 바깥에서 뭘하든 어디에 있든 아저씨와 내가 항상 닿아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아저씨는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바깥에 나가 있다가 사자나 호랑이를 만났는지 두번이나 크게 다쳐서 들어온적이 있다.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매일 저렇게 나가는것 같긴 한데, 자꾸 위험한 일을 당해 집에 돌아오면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다. 나는 아저씨가 없는 내 삶을 상상할수조차 없는데 아저씨는 자꾸만 다친다. 내가 매일 현관에서 아저씨가 무사히 들어서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게 무리가 아닌 것이다. 역시 바깥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우리중 아무도 저 밖에 나가지 않고 매일매일이 주말같았으면 좋겠다. 항상 셋이서 껌딱지 처럼 붙어 있을수만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그래도 가급적 불평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저씨가 매일 먹이를 구해오지 않으면 우리는 굶어죽을게 뻔하니까. 나는 뭐니뭐니해도 고기가 좋다. 가끔은 현관에 들어서는 아저씨의 손에 어마어마한 것이 들려있기도 한다. 엄청나게 구미를 당기는 고소한 냄새, 당장 쓰러져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정도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먹이가 들려있는 것이다. 내가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아저씨를 반기면, 아저씨는 그런 나를 보며 껄껄껄 어린애처럼 좋아한다. 나는 우리 아저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다.
아저씨가 나를 안아 올리면 나는 앞발을 아저씨의 한쪽뺨에 척 갖다댄다. 예전에 우연히 한발로 아저씨 얼굴을 슬쩍 건드린적이 있는데, 아저씨가 너무 헤벌쭉 좋아하는 바람에 "옛다!" 하고 두발을 다 얹어주기로 한거다. 그러니까 우리 둘만의 '사랑의 암호'같은 것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행동이지만 이건 내게 밥을먹는것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아저씨는 나를 소중히 안고 '꼴깍 삼켜버릴테다' 하는 표정으로 내 머리통에 연거퍼 뽀뽀를 퍼부어댄다. 나는 인간이 내게 얼굴을 갖다대는것도 거북하고 뽀뽀는 더더욱 거슬리고 싫지만, 그들 방식의 애정표현이라는걸 알게 되고부터는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만일 아저씨가 나에게 뽀뽀를 퍼붓지 않는다면 오히려 신경이 쓰일것 같기도 하다. 인간들의 세상에 적응 한다는것은, 내키진 않더라도 수용해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저씨가 나에게 뽀뽀를 안하는 일만큼은 절대 절대 안생겨야 한다. 만일 어느날 갑자기 이 상징적인 행위가 중단되는 그런 불상사가 생긴다면, 나는 옛날일이 떠올라 순식간에 얼어붙게 되고 말것이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이다.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징조인 것이다. 십수년 전, 무참히 버려진채 헤메이던 나를 자기집으로 데려가주었던 아줌마와 아저씨이지만, 내가 지금보다 더 늙고 지쳐서 점점 실수가 많아지게 된다면, 내가 버려지는 일이 또다시 되풀이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몇일전에 침대위에 있다가, 나도 모르게 오줌을 푹 싸버렸던 일로 내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짐작도 못할것이다. 나이들면서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가 자꾸 느는지 나자신도 얼떨떨하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감당하기 힘든 불행이 또다시 내게 닥칠지도 모른다. 아저씨와 아줌마는 옛주인과는 달리 내 실수를 모른척 넘어가 줬고, 실의에 빠져버린 나를 다정하게 위로해 줬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옛주인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보장따윈 없는것이다. 그러니 몇일전의 이 불행만 빼면 나는 지금보다 갑절은 더 잘 처신해야 하고, 나무랄데 없는 완벽한 개가 되어야만 한다. 아저씨에게 매달려 매일매일 빠짐없이 애정을 확인해두어야 한다. 매일매일 눈을 맞추며 얼마나 내가 아저씨를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는지 항상 똑똑히 각인시켜 줄것이다. 돌이켜 보면, 첫번째 주인에게서 버려졌던건 내가 그녀에게 확신을 주지 못했기 때문일 공산이 크다. 내가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제대로 확실하게 전달하지 못했던 탓이다. 나는 더욱 투철해질 생각이다. 아저씨와 아줌마가 어느날 갑자기 나를 길바닥에 내다 버리지 못하도록 내가 더 철저히 신경쓰고 노력할것이다. 이 모든것이 나에게 달려있음은 구태여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이다. 긴장을 놓아서는 안된다.
아 그런데 요즘 이상하게 너무 피곤하다. 자도 자도 자꾸만 졸리고 뼈마디가 쑤시는게, 종일 누워만 있고 싶고 모든게 귀찮기만 한다. 아아 이러면 안되는데. 더 열심히 연구 증진해야 하는데. 내가 어떻게 지탱해온 삶인데... 자꾸만 자꾸만 졸음이 쏟아진다. 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좋.......으................ 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