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전환적인 삶을 살아오도록 이끌었던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청소년기 시절은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혼돈 그 자체였다. 시대적으로도 어수선했던 80년대를 살았던 나로서는 두 가지의 큰 상징이 있었다.
첫 번째는 신앙이었다. 모태신앙으로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의 삶을 살고 있었던 나에게 80년대의 세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과연 하나님이 이렇게 어수선한 세상을 왜 바로 잡지 않으실까? 그럼 인간이 이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하는가? 아기장수와 같은 영웅이 이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하는가? 왜 종교는 세상에 눈을 돌리고 구복신앙으로만 빠지는가? 등등이 나의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한 편의 영화가 혼란스러웠던 나의 머리에 큰 충격을 주었다. 미션이라는 영화였다. 영화음악으로도 잘 알려진 영화였다. 그 영화는 교황에 의해 국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포르투갈의 영역으로 포함된 아마존 원주민들의 신앙촌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고민하는 두 신부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끝까지 종교인의 삶을 살면서 비폭력적으로 신앙인으로서 순교하는 삶을 사는 쪽을 택한 신부님과 처절하게 끝까지 대중과 함께 저항하다 생을 마감하는 신부님들의 이야기다.
나는 그 두 가지 방향 중 후자를 택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난 그날 시청에 그들과 함께 있었다.
두 번째는 바람이었다. 물리적인 바람도 나에게는 상징처럼 다가왔었다. 윈드서핑에 푹 빠져 항상 바람을 느끼는 삶을 살았다. 바람이 싱그럽게 내 머릿결을 스치면, '아 오늘 윈드서핑 타러 갈까?'. 폭풍우가 몰아쳐도 '오랜만에 강풍이 부는데 타러 갈까?' 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른 바람은 전공과 관련하여 사회전반적으로 몰아쳤던 급격한 변화였다. 사실 정보통신과 관련된 기초과학은 당시에도 이미 정립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당 부분은 큰 전쟁들(2차 세계 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군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범용적으로 사용하면서, 90년대부터 거대한 변화가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 정보화시대의 바람은 온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것들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입사 초기에는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Personal Compuet 이기는 하지만, 컴퓨터는 공용으로 사용했다. 자신의 책상에서 종이에 펜으로 업무를 보다가 문서화하거나 작업을 할 때만 공용컴퓨터를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데이터는 플로피디스크로 저장하였고, 반복되는 업무를 위해 데이터베이스를 사용하는 사람은 몇몇 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리고 매년 새로운 권고집과 규약집이 발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IEEE 권고집이었다. 우리는 발표 연도에 따라 Blue Book, Yellow Book, Red Book이라고 불렀었다. 그러나 명칭만 Book이지 실상은 한 서고에 가득 찬 책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책들을 다 가지고 있는 회사가 극히 드물정도로 구하기도 힘들고, 읽기도 힘든 책들이었다.
나의 20대 말은 이 책들과 씨름하면서 보냈던 것으로 기억된다. 첫차를 타고 출근해서 거의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었는데, 일과 정보 습득을 동시에 하는 생활을 몇 년 동안 지속했었다. 그 지루했던 시절에는 꿈도 많았고, 새로운 도전에 흥분도 했었고, 이렇게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아쉬움도 토로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없이 많은 책들을 읽고 그 정보와 지식들을 내 것으로 만들었다.
IT 붐이 일어났던 90년대 중반부터는 이러한 지식들을 제안서라고 하는 형식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일주일에 3개 이상의 제안서를 작성했고, 2군데 이상의 제안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생활을 2~3년간 하다 보니 내가 제안서 뽑아내는 프린터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었다.
그러나 나름의 보람도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공공장소, 공공시설 들 중 상당 부분에 내가 설계하고 제안한 제품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아들 녀석에게 자랑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한국에 몰아쳤던 정보통신 바람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20대를 보냈었다.
세 번째로 나의 삶을 바꾼 상징은 가족이었다. 명예, 돈을 좇기보다는 가족과 함께하는 삶을 택했다. 물론 나의 능력 없음을 포장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를 위해 나는 외국계 회사로 옮기게 되었다. 그때 생각으로는 외국계 회사에서는 주어진 일만 성실히 수행하면 나머지의 시간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덕분에 많은 추억을 가족과 공유할 수 있었고, 그 추억들은 나의 가장 큰 보물이 되었다. 그리고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삶의 방식도 크게 변화되었다. 오랫동안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고, 개인 사무실 공간을 만들었고, 자투리 공간에 야채를 기르고, 꽃을 가꾸고, 나무를 가꾸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오롯이 가족의 공간이 생기자 더욱더 마음은 평온해졌고, 이 공간에서 일을 하고, 책을 보고, 사색하고, 지인들을 초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나의 가족의 개념은 혈연적인 가족이 아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고 마음을 나누는 사람은 가족이다. 식구이다. 같이 밥 먹고 같이 공감하고 같이 살아가는 이들이 나의 가족이다.
나는 나의 가족들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아마도 네 번째 상징을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