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경환 Dec 20. 2023

동지 팥죽     

4대 명절이라고 하면 대개 ‘설날, 단오, 한식 추석’을 말한다. 여기에 ‘동지’를 더하면 5대 명절이 된다. 이들 중 ‘단오’와 ‘한식’은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이고, ‘동지’는 그나마 팥죽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동지를 ‘작은설[小新正]’이라 해서, 마치 설날에 떡국을 끓여 먹듯이 이날 팥죽을 쑤어 먹는 습관이 있어 오늘날에 이른다. 팥을 흠씬 삶아 건져서 굵은 체에 대고 문지르면 팥 껍데기는 체에 남고 고운 앙금이 아래에 생기는데, 여기에 쌀을 넣어 죽을 쑤면 팥죽이 된다. 거기다가 찹쌀로 경단을 만든 세알심을 죽이 거의 다 쑤어져 갈 때 넣어서 먹는다. 동지 팥죽은 아주 가난하면 쑬 수 없어서 어려운 사람한테 덜어 보내는 훈훈한 풍습이 있었다. 동짓날은 어쨌든 온 서울 사람이 한 끼를 팥죽으로 삼았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사라졌지만, 그 정성 들여 만든 팥죽을 대문에 ‘액막이’로 끼얹는 풍습이 있었다. “공공씨(共工氏)에게 못난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 죽어 역귀(疫鬼)가 되었다. 그 아이가 붉은 팥죽을 싫어했기 때문에 동짓날 팥죽을 쑤어 역귀를 물리친다.”라는 중국의 기록(『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이 전하지만, 대개 귀신이 붉은빛을 싫어하기 때문에 생긴 풍속일 것이다. 필자는 그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과히 아름다워 보이는 풍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한 풍습을 노래한 시 두 편을 읽어보자.


동짓날 펄펄 끓는 팥죽(至日蒸蒸赤豆粥)

꿀 탄 새알심은 계란 같구나(糯心如卵和蜂糖)

철음식일 뿐더러 역신도 두려워하니(非徒時食疫神畏)

문짝에 흩뿌려 물리친다네(爛灑門扉不祥)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을 총망라해 기록한 『동국세시기』의 저자 홍석모(1781~1857)가 지은 『도하세시기속시』의 「두죽(豆粥)」이라는 시다.


집집마다 팥죽 끓는 향내(赤豆家家煮粥香)

문에 뿌려 부적을 대신하네(潑來門戶替符禳)

오늘 아침 산(山) 귀신 쫓아냈으니(今朝遂盡山臊鬼)

양(陽)이 나는 동짓날 길상 맞겠네(冬至陽生迓吉祥)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의 오명을 뒤집어 쓴 최영년(1859~1935)의 『해동죽지』에 나오는 시다. 시 앞머리에 “옛 풍속에 동짓날 붉은 팥죽을 끓여 문에 발라서 상서롭지 못한 것을 물리쳐 복을 빌었다.”라는 해설을 붙였다.


시뻘건 팥죽을 대문에 뿌려 악귀를 쫓는 것은 무슨 원시부족의 제의처럼 낯설다. 그래서 영조는 “문에 팥죽 뿌리는 일을 없애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으려는 나의 뜻을 보이라”고 했다.(『영조실록』) 그렇지만 그 습속은 완강하게 이어져 내려오다가, 근대 합리주의의 물결에 휩쓸려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추사 김정희(1786~1856)는 거기에서도 나름의 멋을 찾고자 하였다. “동짓날이 이미 지났으니 아마도 부호의 집에는 황감(黃柑), 곧 귤을 전해 줄 건데, 들사람은 다만 팥죽을 사립문에 뿌릴 따름이니, 풍미가 사뭇 동떨어진 것도 역시 하나의 멋이라면 멋이 아니겠는가.” 물론 대문 없는 아파트에 우우 몰려 사는 오늘날 이 풍속은 발 딛고 설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팥죽을 나누어주는 그 훈훈한 풍습만은 입춘날 ‘입춘대길(立春大吉)’을 기원하는 춘첩(春帖)을 붙이는 풍속과 함께 소중히 간직해 나아가야 할 미풍양속이 아닌가 한다. 다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풍양속이 되려면, 하찮아 보이는 데에서도 멋을 느끼는 김정희와 같은 마음 언저리가 먼저 필요할 것이다.


동지팥죽과 관련해서는 단팥죽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도 물론 “꿀을 타서 먹는다.”(『경도잡지』)고는 했지만, 요즘 먹는 달달한 단팥죽은 새알심 대신에 인절미는 넣은 것으로, 일본의 ‘시루코(汁粉)’를 흉내를 낸 것이다. 시로쿠는 일종의 디저트 음식이지 팥죽처럼 본격적인 식사는 아니다. 그리고 식구들의 나이 수대로 넣어 먹는 새알심은 찹쌀가루나 수숫가루 등을 반죽하여 만들었다. 한마디로 요즘의 단팥죽은 일식(日食) 스타일인 것이다.


그리고 불과 50~60년 전만 해도 팥죽은 겨울철 시식(時食)으로 대단한 인기가 있어서 붙박이로 팥죽만 쑤어 파는 집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종로 5가 동대문 시장을 낀 쪽에 있는 팥죽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메워져 있어서 말하자면 명물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팔기 시작해 아침나절이면 떨어져 없어진다. 동대문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마바리꾼, 장꾼, 그리고 우대에 사는 별식 좋아하는 사람들이 팥죽을 목표로 모여든 것이다. 행상도 있었다. 팥죽 담은 동이를 포대기로 둘러싸서 식는 것을 막고 그것을 머리에 이고 ‘팥죽 사려’하고 외치고 다니면, 새벽일 나온 품팔이들이 담에 기대어 먹었고, 새알심 값을 따로 쳐 받았다고 한다.(조풍연, 『서울잡학사전』)


최근에는 고가(高價)의 죽집이 대단한 인기를 얻어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데, 정작 동지팥죽에 어려 있는 멋이랄까 훈훈한 정 같은 것은 하찮은 옛일로 묻혀 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오늘같이 흐린 날, 펄펄 끓는 팥죽을 후후 불면서 떠먹으면 답답한 속이 시원하게 뚫릴 것 같다. 그러고보니 내일 모래가 동지다.


작가의 이전글 정상채(鄭尙采)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