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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20. 2023

서(恕)에 대하여 (길고 따분한 이야기)


(1) 《논어》 <안연 12-2> :


중궁이 인에 대해 묻자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그러면 나라에 원망할 사람이 없고, 집안에도 원망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중궁이 말했다. “제가 비록 명민하지는 못하지만, 그 말씀을 받들겠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은 《논어》에 두 번 나온다, 《예기》 〈중용〉과 《관자》 〈소문〉에 나오듯이, 이는 공자의 말이 아니라 당시의  관용어였다. 다음에서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안연(顔淵]) 12-22)이라 했고, “자기를 수양하여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라”(「헌문(憲問)」 14-42)고 했다. 그런데 인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고, 인이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편하게 하는 것일까? 관건은 “추기급인(推己及人)”, 곧 자기를 위하는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하는 데 있고, “자기가 일어서고 싶으면 남을 일으켜 주고, 자기가 이루고 싶으면 남을 이루게 해 주는”(「옹야(雍也)」 6-30) 데 있다.


그런데 반대로 좋은 것 혹은 진리 같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있을까? 역시 아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내가 당신보다 강하고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장악하고 있으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지만, 좋은 것을 그저 나 혼자만 누릴 수 없으니, 당신들도 내 방식에 따라 생활해야 하며, 당신들이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내가 그저 가만히 손 놓고 앉아 지켜보면서 당신들을 구제하지 않을 수 없고, 내게는 당신을 도와줘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나로 하여금 돕지 못하게 한다면 나 역시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계속해서 말을 안 듣는다면 나는 무례해질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이전(「옹야(雍也)」 6-1)에서 공자가 중궁(염옹)이 제왕의 자질이 있어 나중에 큰 지도자가 될 만하다고 한 칭찬을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맞이하는 것처럼 하고,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는 것,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 것, 그래서 “나라에 원망할 사람이 없고, 집안에도 원망할 사람이 없”는 것이야말로 지도자의 덕목이자 정치의 최종 목표일 것이다. 공자의 교육 방식이 철두철미 수용자의 자질과 수준과 성품 등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절은 주희의 설명대로 “경(敬)과 서(恕)”, 두 글자로 요약할 수 있겠다. “경으로써 자기 몸을 갖고, 서로써 남에게 미친다면 사의(私意)가 용납할 곳이 없어서 마음의 덕이 온전해 질 것이다.” 정치의 근본은 사람을 공경하고 나아가 섬기는 일이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을 남에게까지 확장해서 일관되게 유지하겠다는 다짐과 각오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과 서 사이에 종사하여 얻음이 있으면 장차 이길 만한 사욕이 없게 될 것이다.” 아아, 오늘날의 정치 모리배들을 생각하면 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다. 사의와 사욕을 빼면 남는 것이 똥뿐이 없는 것들이 정치를 한다고 나대고 있으니, 우리 백성들 참으로 딱하다 못해 안쓰럽다.


다산은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행간(行簡)이다.”라고 한 명 나라 ‘양명좌파’인 탁오(卓吾) 이지李贄, 1527~1602)의 주장을 부정했다. 아쉽게도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지는 않았다. “거경이행간(居敬而行簡)”(「옹야」 6-1)에서 보았듯이, “행간”은 행하는 바를 간소하게 한다는 말이다.


다산은, 인과 관련하여 안연에게 “극기복례”를 말한 것은 건도(乾道)이고, 중궁에게 “경과 서”를 가르친 것은 곤도(坤道)라고 하면서, 두 사람의 “학문은 그 높고 낮음과 얕고 깊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라고 한 주희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야말로 극기(克己)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산에게 극기는 곧 서다.


“추기급인”이나 “기소불욕, 물시어인” 같은 말이야말로 오늘날 특히 가슴에 새겨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 사회 최대의 화두인 연대(連帶)는 이런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말을 누구나 가슴에 새길 의향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 왔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일갈을 다시 생각해 본다.


- 참고로, 루쉰의 말대로, 문지방 하나를 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것이 잘 안 되니까 모든 것이 자기 자랑, 자기 가문 자랑, 자기 지역 자랑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도포 입고 갓 쓰고 향교 출입이나 하면, 스스로 유학자인 줄 아는 것이다. 어차피 원시유학자는 의례 집행인에 불과했다. 그러나 모든 의례와 절차에 형식이 아닌 ‘급인(及人)’의 마음을 담는 것,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생활에 체화(體化)하는 것, 그 마음을 이웃으로 넓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유학의 핵심이고 인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모든 유학이 ‘급인’이 아니라 ‘급기(及己)’에 그치니 인의 실현은 요원한 일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시중(時中)’도 어쩌면 이상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급인(及人)’이 없는 ‘시중(時中)’은 그야말로 공염불이며 포즈에 불과할 것이다.


(2) <위령공 15-24> :


자공이 물었다.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한 마디 말로 어떤 것이 있습니까?” 스승님께서 대답하셨다. “그것은 서(恕)일 것이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구절은 앞의 「안연(顔淵)」편 12-2에서도 보인다. 내가 보기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추기급인(推己及人)”, 곧 나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도달한다는 말과 상통하는데,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크게 보면 역지사지(易地思之)도 마찬가지다. 요즘 우리 사회 최고 덕목인 연대(連帶)는 이런 마음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 이 아름다운 말을 누구나 가슴에 새길 의향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런데 그 실천은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수는 없다. 자신을 함부로 하면서 남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자신 혹은 남에게 등을 돌릴 수 있다.


“서(恕)”를 나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의 결합으로 읽는다. 우리가 흔히 ‘용서’라고 하는 것은, 제 기분에 따라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마음이 아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용서는 곧 원망과 증오로 변할 수 있다. 진정한 용서란 상대를 향해 처음 먹었던 마음을 변치 않고 줄곧 이어가는 마음에서 가능하다. 공자가 앞의 「이인(里仁)」편 4-15에서 “일이관지(一以貫之)”, 곧 “하나로 꿰뚫는다.”라고 한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대만 학자 난화이진은 이 구절을 “자기가 바라는 것을 남에게 베풀라(己所欲, 施於人)”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이 말은 훗날 불가 사상이 중국에 전해질 때 보시(布施)로 번역되었다. ‘베풀 시’ 앞의 ‘보’ 자는 ‘널리[普遍]’라는 뜻이다. 불가의 보시와 유가의 서(恕) 사상은 같은 것으로, 소위 ‘자비를 근본으로 삼고 방편을 문(門)으로 삼는다’는 것이 바로 보시의 정신이다. 인생에는 두 가지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있는데, 하나는 재물이고 하나는 목숨이다. 인간세상을 이롭게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생명과 재산을 모두 바치는 것이 ‘시(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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