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은, 송시열이 시집가는 딸에게 “(지아비가) 일백 첩을 두어도 볼 만하고, 첩과 아무리 사랑하여도 노기 두지 말고 더욱 공경하라”(〈계녀서(戒女書)〉)고 할 만큼 가부장적 질서가 공고화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비첩에게 빠져 이혼을 요구한 유정기란 남편에 맞서 싸운 처 신태영의 저항은 의미가 대단히 깊다. 결국 이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신태영은 지아비를 모함한 악녀가 되어 태(笞) 40대와 장(杖) 80대를 맞고 전라도 부안에서 4년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다.
번화한 한양과 그 인근에 거주하는 경화사족인 유정기와 혼인할 정도라면 신태영의 집안도 대단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량한 딸을 두었다는 질타 속에서 신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신태영의 저항이 친정을 파멸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런데 신태영의 저항은 유정기와 그의 가문에 더 심각한 상처를 입혔다.여기서 그 양상을 상론하기는 어렵지만,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하다. 참을 수 없는 박해에 저항한 결과 결국 자신과 친정은 비참한 몰락을 겪었지만, 그건 일방적인 패배가 아니었다. 물론 조선이 끝날 대까지 신태영의 저항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강명관은 이런 결론을 얻는다. “여성의 주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여전히 살아 있음을 신태영이 보여주었다. 남성-사족의 가부장제는 여성을 삼켰으나, 여성은 가시가 되어 목에 박혔다. 더 깊이 삼킬 수도 없고, 쉽게 뱉을 수도 없었다. 남성에게도 그것은 불행이었다.”
17세기 이래 여성을 가부장제로 훈육하고자 하려는 노력들이 하나씩 성공해갔지만, 완전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에 대한 훈육이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유교적 가부장제의 모순 역시 심화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