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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n 21. 2023

'규격'이 존재하는 사회에 개인은 없다.

사회적으로 '표준 규격'을 설정하여, 이것에 맞추어 행동하도록 하는 것.

이는 전형적인 집단주의 사회의 특징으로, 이것이 극단화되면 전체주의로 가게 된다.

개성의 박탈과 획일화, 이것이 바로 전체주의의 단초이자 핵심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시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우리에겐 별 문제가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한 사회에 암묵적으로 작용하여 이를 지킬 것이 요구되는 수칙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개인'의 존재와 자율성을 부정적으로 대한다 할 수 있다. 알아서 하면 될 것을 사회·문화적 규칙으로 정해 두고, 이를 따르지 않는 이는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배제하며 단죄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집단에서 과연 개인이 자기 자신의 의견과 사고를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을까?

만일 이런 것이 아예 정부 주도로 규칙화되어 있는 사회라면 실로 심각하다. 마치 군사분계선 이북 정부에서 머리 모양과 의복까지 규제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 토를 달거나 훈수를 두는 것, 그리고 그것이 마치 하나의 체계(시스템)처럼 작동하는 것도 집단주의의 대표적 폐단이다. 옳고 그름을 알아서 판단하게 하지 않고 일일이 타자의 규제와 통제를 받도록 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를 집단의 아래에 두겠다는 의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간섭이나 지적을 않는다 하여 무작정 좋게 볼 수는 또 없는 것이, 애초에 누군가가 '그런 행동'을 할 경우 이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를 형성함으로써 가 그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을 타의에 의해 교정하도록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식적으로는 '자율 복장'이라지만 실상은 모두가 검은색 양장과 흰 셔츠를 입는 것이 암묵적 규칙인 곳에서 누군가가 남색이나 회색 정장을 입고 온다? 심지어 청바지를 입었다면? 그 사람은 호기롭게 그런 선택을 했을지라도, 그런 무형의 압력이 작용하는 곳에서는 결국 자신의 행동을 바꾸게 된다. 그것이 실제 규칙으로 제정되어 있지는 않다 할지라도 이미 옳음의 기준으로 확립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자유란 크게 의미가 없다.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때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맞는 말이다.




'쟤는 왜 저렇게 해?'


이건 사실 아이들이나 할 법한 질문이다. 아이들이 경험하는 최초이자 사실상 전부인 사회는 가정이다. 그러니 그곳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과 다른 이의 방식이 충돌할 경우 순수한 호기심(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이는 어느 정도 외부로부터 이식된 관념이기도 하다)에 의해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겠으나, 점점 가정 이외의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타인의 행동에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그가 정서적으로 홀로서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아예 그 사회가 개개인으로 하여금 어떤 동일 내지 유사한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추동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다름'은 '틀림'이 된다. 혹여 다름과 틀림을 언어적으로 구분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다수와는 다른 무언가를 취한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면 그 사회에서 '개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에게는 설 자리가 거의 없다. 그리고 그 사회에서 개성이란 부정적 개념이다.


형식적으로 자유로운 것과 실질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반드시 구분되어야 한다. 헌법과 체제가 자유를 보장한다고, 그래서 내가 하고픈 대로 행동하고 생각할 수 있다고 해서 진정 자유로운 사회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마치 '특별한 것'은 특정 소수의 전유물로 인정되나, 정작 다수의 평범한 이들에겐 그것을 용인하지 않는 사회라면, 말로는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다면서도 정작 실제로는 '너는 그 모양'이니 분수를 지키라는 분위기가 강한 곳이라면 그 사회는 자유롭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 금기가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하는 무형의 틀로 존재하면 존재할수록 그 사회는 자국민까지 이에 얽맬 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이에 맞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의문을 던지는 이는 배척한다. 이것이 강해지면 그 사회는 폐쇄적인 배외(排外)사회로 남게 되고,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사회의 압력에 따르게 된다. 결국 겉으로는 다양해 보여도 실질적으로는 획일화된 삶이 표준이 되고 마는데, 말로는 하고픈 대로 하라면서 "다들 이렇게 하는데 왜 너는 그렇게 안 해?"라며 은근슬쩍이라도 힐난하는 곳에 무슨 자유가 있으며 개성이 있을까?


이런 사회가 맞이할 미래는 결국 몰락이다. 사람들은 '문제 없이 생존하기 위해', '문제아로 낙인찍히지 않기 위해' 기존의 규칙에 최대한 순응하지만, 이는 계속해서 개인에게 부담을 가하는 구조이므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으며, 무형의 압력이 강한 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점점 사회가 요구하는 것과는 어긋나는 행보를 보인다. 처음에는 개별적인 문제로 대두되던 것이 점점 누적되면서 사회 문제가 되고, 이것이 도무지 개인의 의식 전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 차원의 문제가 돼버리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게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으나,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회라 할지라도 안을 들여다 보면 '사회의 안정적 존속'에 반하는 사건이 구조적으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으며, 그것이 결국 다른 구조적 문제를 유발함을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그런 돌발행동이 구조화됐다 할지라도 의식적 각성을 통한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하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아무리 사회 곳곳에 구멍을 뚫는 행동을 한들 기존의 틀을 깨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사회 유지를 저해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다른 한쪽에서는 여전히 사회를 지속하게 하는 '암묵적 규칙'에 따라 행동한다. 이런 곳에서 사람들은 변화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반적으로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것이란 절망감을 품고 있기에, 이는 부정적인 형태의 에너지로 축적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된다.




어느 사회에나 문제는 있다. 이는 주로 정치 및 경제적 문제와 결부되어 소득(계층) 양극화와 정치적 양극화로 나타나 각 사회에 위기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국제적 추세로 볼 때 몇 가지 큰 문제가 인류 존망을 좌우할 만한 크기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상기(上記)한 내용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인간은 존재하되 개인은 없는 사회, 형식적 자유는 보장돼 있으나 실질적 자유는 온전하지 않은 사회, 집단의 논리에 밀려 개인의 의견은 감춰지는 사회는 초국가적 위기 상황과는 별개로 이러한 내부 모순에 의해 붕괴할 위기를 안고 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이 나라 한국과, 옆나라 일본이다.


한국은 여전히 집단주의 사회다. 그리고 일본은 겉으론 개인주의 사회지만 실제로는 '집단주의가 강하게 작용하는 변질된 개인주의 사회'다. 두 국가에서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개인이 사고와 행동의 본위로 자리매김한 적이 없다. 이것이 두 사회가 지닌 공통분모 중 하나다.


한국과 일본은 이러한 내적 모순으로 인해 서서히 무너져 왔으며, 지금에 이르러서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물론 한국은 어느 측면으로 보나 독보적이다.



-끝-


최종수정 : 2023.06.2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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