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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CY Jul 27. 2023

모르고 지나갈 뻔한 '오늘'

70년 전 그날의 사건, '7.27 정전협정'

지인을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평소엔 인적 드문 귀퉁이에 파라솔이 잔뜩 펴져 있는 것을 보고 깨달았다.

'아, 오늘 장날이구나.'

그 생각을 하자마자 꼬리를 물고 다른 생각이 불쑥 떠오른다.

'아, 오늘 7월 27일이구나.

그래, 그날이구나.'


오늘이 무슨 날인지 오후 다섯 시가 가까이 돼서야 알아챘다.

그렇다. 오늘은 6.25 전쟁이 '정전(停戰)'이란 이름으로 마무리된 날이다.

-

'민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말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당장 떠올리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들어봤을 말이다. 일제강점기 이상으로 6.25의 의미는 한국인에게 남다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수많은 문제가 저 전쟁으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만큼 한국 현대사에 어마어마한 흔적이자, 한편으로는 도무지 씻어낼 수 없는 낙인으로 남은 6.25 전쟁.


그 지리멸렬한 3년간의 전쟁이 바로 70년 전 오늘 끝이 났다는 것이 아닌가.

그걸 미처 떠올리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 당연한 얘기다. 70년 전 일이 아닌가?

하지만 늦게나마 그 사실을 떠올린 나는, 마음 한편에서 피어나는 씁쓸함과 답답함을 금할 수 없었다. 여전히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은 현재 진행형이고, 이것이 정말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협정의 당사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형태의 종결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미군과 중공군(그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이란 이름을 내세우며 일부 세력의 자발적 참전을 주장한다.), 조선인민군 대표자만이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한다. 뭐, 그렇다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무효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기권한다고 원치 않는 유력 후보가 당선되지 않는 것은 아닌 이치라 하겠다.


이 상처만 남은 전쟁에서 얻은 것이 무엇일까? 누군가는 '얻은 것'이란 표현에 거부감을 느낄지 모르겠으나, 전쟁은 단순히 다 죽이고 때려 부술 목적으로 일으키는 유혈성 유희가 아니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삼으면서까지 얻을 만한 것이 있기 때문에 일으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에 가치가 없다면 푸틴이 크림(크름) 반도를 침공하여 병합하지도, 우크라이나 영토를 전면 침공하여 동부에 괴뢰국을 수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운 이들이 왜 이 '남조선'을 침략했느냐에 대해서는 조금 다르게 본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저들이 대한민국을 공격한 것은 '조선 반도 공산화'라는 사명의식 때문이었다. 물론 '온전한 국토'에의 인식이 그들을 추동했겠지만, 옛 조선의 강역을 공산화라는 방식으로 손에 넣기 위한 사실상 유일한 방책이 그들에게는 전쟁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때만 해도 전쟁이란 것이 그리 사람들에게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되었고, 국공내전은 불과 1년 전에 막을 내렸으니 언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한 것이 없었다. 그까짓 전쟁, 그들에게는 만지작거릴 만한 선택지 중 하나였던 것이다.


강조하지만,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그러한 선택을 내렸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과감한 결단(?)은 수포로 돌아갔다. '신해방지구'란 이름으로 황해도 남단의 영토를 (그들 입장에서는) 되찾았지만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의 일부는 저 남조선에 빼앗겼다. 실제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복한 구역은 빼앗긴 구역보다 3000제곱킬로미터 이상 넓다. 그네들('공화국' 타령하는 이북 정권 말이다) 입장에서는 초반 3개월이나 신이 나서 방방 뛸 만했지 그 이후로는 걱정과 근심, 초조함으로 이걸 어찌해야 하나 싶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게 갈팡질팡 오도가도 못하는 동안, 수많은 민간인이 총포에 사망했고, 군인으로 징집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시간만 자그마치 2년. 지도부의 판단이 내려지기까지 불필요한 인명 살상이 계속되었다.


비로소 전쟁 3년 1개월차인 1953년 7월 27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 겸 미군 육군 대장 아서 웨인 클라크(Arthur Wayne Clark)는 한 자리에 나란히 앉아 정전협정서에 서명했다. 나 같으면 저 '간악한 빨갱이들의 수장'을 권총으로 쏴 버렸을 텐데, 그 자리에 무장한 채로 접근할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한낱 망상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좌우간, 전쟁은 고작 세 명의 서명으로 끝이 났다. 그뿐이었다.




이산가족이 불쌍해서, 북한 인민의 처지가 안타까워서라도 통일하자는 의견, 한때 나도 가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감정을 이유로 통일을 외치기엔 너무나 멀리 왔다. 차라리 중화민국(대만) 정부가 그랬던 것처럼 탐친(探親)을 전면 허용하여 늦게나마 대륙의 고향에 방문해 친척을 만나도록 하는 식으로 했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것이나 이북 정권의 수장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었을 테고, 애초에 저들을 해방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지상과제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라 '조선 인민을 대표하는 조선노동당 총비서'인 김 모가 해야 할 일이다. 말로는 조선 인민을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힘쓴다면서 하는 건 무기 개발. 뭐, 그런 절망적 경제 상황에서 그 정도로 무기를 개발하는 걸 칭찬해줘야 하나 싶으면서도, 막상 그러는 걸 보면 한심스럽고 화가 난다.


이 모든 것은 '결사 옹위의 대상'인 '최고존엄', 즉 일인숭배체제의 정점을 위해서 자행되는 일이(었)다. 정치를 위해 인륜과 도덕이 파괴되어 왔다. 나는 그런 국가와 손을 잡기를 원치 않는다. 헌법적 의무 이행? '그 헌법 조항'은 그냥 사문화시키면 그만이다. 한 나라의 정부가 지켜야 할 의무는 '실효 지배'하는 국가의 인민의 복리와 후생을 추구하는 것이지 당장 차지하지도 못할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갖은 수를 동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단순히 같은 민족이라는 이유로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구시대적이다. 이걸 '젊은 세대의 이기주의화'를 들먹이며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수구적인 태도임을 알아야 한다. 민족은 죽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참혹했던 전장의 현장 위에 살아가고 있는 이로서, 그 역사의 연속선상에 자리한 사람으로서, 나는 6.25 전쟁과 오늘 7월 27일을 기념하고 회상할 생각이다. 그것이 내가 내게 부여한 역사적 사명이다. 다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이 땅에 일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에, 그것이 굳이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면서까지 이룩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더해졌을 뿐이다. 저들이 '조선'을 간직하고 싶어하듯이, 우리는 '대한'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그냥 인정하면 된다. 그것이 평화의 첫걸음이다. 저들의 내부 사정까지 챙기기엔, 국가와 사회, 개인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은 이들조차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니.




여러모로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다. 많은 문제가 발생해 왔고, 언론을 통해 수많은 사건사고가 보도되면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 이에 분노를 표한다. 이를 고려하면 역사적 주제는 사실 그리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막중함 앞에 과거가 무슨 소용이랴? 그런 측면에서 이런 주제로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이 일면 무의미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득 '오늘'을 떠올린 오늘, 나는 앞뒤 재지 않고 그냥 내 생각을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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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사진 출처 : 위키백과,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 항목 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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