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술과 이야기를 담은 강화에서의 하루

by 정선아

프라이팬 위의 버터처럼, 숨만 쉬어도 녹아내리던 7월의 마지막 주. 우리는 인천 강화도의 바닷가 펜션 ‘노하 라운지’에 모였다. 직업은 달라도 F&B라는 공통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일곱 사람. 위스키 작가, 시가 브랜드 매니저, 와인 소믈리에, 수입사 대표, 후추 셀렉터, 전직 위스키 앰버서더 그리고 아름다운 노하의 주인장까지. 이번 모임의 이름은 “라운지 앤 런(Lounge & Learn) F&B 서머 세션” 각자 나누고 싶은 술이든, 식재료든 이야깃거리를 챙겨 오기로 했다. 취향 공유에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마음까지 함께 꺼내보자는 약속처럼. 누군가는 묵직한 아일라 섬의 피트향을 피워냈고, 또 누군가는 향긋한 후추 알을 펼쳐냈다. 자메이카의 뜨거운 럼도 있었고,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꽃들의 조잘거림도 들렸다. 강렬한 햇빛과 만조 직전의 조용한 바다, 유리잔 너머에 퍼졌던 향과 맛 그리고 사람. 그날을 채운 이야기 조각들을 모아보았다.

1. 정보연 – “기억을 피워 올리는 위스키, 쿨일라”

모임의 호스트는 위스키 작가 정보연 님이었다. 『하루의 끝, 위스키』와 『여행의 끝 위스키』를 통해 위스키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삶의 감각’으로 풀어내는 그녀. 용산구 청파동에 ‘보연정(寶姸亭)’이라는 공간을 운영하며, 위스키와 재즈, 철학과 예술을 엮는 모임을 꾸준히 열고 있다. 이번 강화도 모임 역시, 그녀의 손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님이 들고 온 위스키는 아일라섬의 싱글 몰트, 쿨일라(Caol Ila). 조니 워커의 블렌딩용 원액 생산처로만 알려졌지만 최근엔 싱글 몰트로 주목받는 이 위스키는 로댕의 조각처럼 멋진 균형미를 갖췄다. 아일라 위스키답게 피트와 요오드 향이 느껴지지만 쿨일라는 그 강도가 비교적 부드러워 입문자도 편하게 즐기기 좋은 스타일이다.

‘The Islay Home of Johnnie Walker’라 불릴 만큼, 지금은 조니 워커 블렌딩의 핵심이 되었고, 독립 병입자들이 애용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작가님은 단지 이 술의 향과 맛만이 아니라, 위스키가 품은 기억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코틀랜드에 거석문화가 있잖아요. 스톤 서클처럼. 우리나라 강화도의 고인돌은 죽은 이를 위한 무게라면, 스코틀랜드의 스톤은 하늘을 향한 기도였죠. 위스키를 마시면 그 돌의 냄새가 나요. 오래전 사람이 남긴 기억의 향기.”

실제로 아일라섬 곳곳의 바닷바람 속에는 이끼, 돌, 연기, 물의 향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위스키를 통해 사람과 기억 그리고 오래된 이야기를 불러낸다. 이 날의 쿨일아 한 잔은 마치 바다를 바라보는 입석(standing stone) 같았다.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지금 여기라는 시간을 새겨주는 맛이었다.

2. 조용범 – “연기로 채워지는 아름다운 시간”

다비도프는 시가를 단순한 흡연 도구로 보지 않는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인가. 그 질문에서부터 시가 한 개비의 여정이 시작된다. 조용범 과장님은 그 철학을 누구보다 섬세하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첫인상은 강한 인상의 남성적인 분위기지만 시가에 대해 이야기할 땐 언어의 결이 한층 섬세해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피우느냐에 따라 시가의 인상이 달라집니다.” 이 한마디가 다비도프의 모든 시가를 관통한다. 그가 소개한 세 가지 시가는 햇살이 식고 바람이 느려지는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첫 번째는 Signature Toro(시그니처 토로). 다비도프 철학의 정수를 담은 클래식한 시가로, 절제된 플로럴 향과 바닐라, 흙내음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고요한 바닷가에서 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우아하게 감싸는 향이다.

두 번째는 Winston Churchill Original Robusto(윈스턴 처칠 오리지널 로부스토). 약 13cm 길이의 로부스토는 시가 세계의 표준이라 불리는 포맷이다. 중후한 가죽과 후추, 향신료가 조화로운 이 시가는, 열정적인 대화와 함께하는 이른 밤에 잘 어울린다.

세 번째 The Late Hour Robusto(더 레이트 아워 로부스토). 싱글몰트 위스키 캐스크에서 숙성된 필러 덕분에 오크와 다크 초콜릿, 블랙페퍼 풍미가 다채롭게 채워진다. 하루의 끝자락. 고요한 어둠 속에서 피우기 좋은 시가였다.

다비도프의 시가는 모두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생산된다. 재배부터 판매까지 직접 관리하는 Crop to Shop 철학을 바탕으로, '현대 시가의 현재'를 보여주는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좋은 시가는 결국 시간을 채우는 방식이다. 혼자 있어도, 누군가와 함께여도. 그날의 연기엔 고요한 힘이 있었다.

3. 홍성인 – “펑키하지만 섬세한 한 모금”

이날 가장 강렬한 술을 소개한 분은 홍성인 대표님이었다. 프리미엄 수입주류회사 나우스피릿(Nauspirits)을 이끄는 그녀는 싱글럼부터 칼바도스까지 업계에서 ‘선구자’라 불린다. 이름만 보고 남성분인가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섬세하고 가녀린 여성분이셨고 이 뜨겁고 강렬한 술들을 오랜 시간 수입하고 소개해왔다는 사실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술 이야기를 시작하자 그녀의 눈빛은 진지하게 빛났다. 나눠주신 술은 자메이카 빈티지 럼(Rum). 딱 한 모금. 펑키한 향에 화들짝 놀랐다. 입안에서 강렬하게 터지고 그 향은 머릿속 깊숙이까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자메이카는 ‘하이 에스터(High Ester)’ 럼의 본고장이다. 오래 발효된 당밀, 덤피(fermentation residue) 그리고 전통적인 팟스틸 증류는 바나나, 파인애플, 치즈, 흙 내음까지 뒤섞인 펑키한 향을 만들어낸다. 햄든(Hampden)이나 워시 파크(Worthy Park) 같은 이름만으로도 애호가들의 가슴을 뛰게 할 만큼 자메이카 럼은 향 그 자체로 기억되는 술이다.

강화도의 석양 아래에서 마신 자메이카 럼도 그랬다. 단 한 모금이었지만 향이 바다를 타고 콧속에 쾅하고 정박했다. 강렬하면서도 묘하게 우아했고, 순간적으로 멈칫할 만큼 섬세했다. 익숙한 단맛이 아닌, 발효와 숙성의 날 것 그대로를 전하는 술.

이 술을 병입 한 Transcontinental Rum Line, TCRL(트랜스컨티넨탈 럼)은 트로피컬 기후에서 숙성한 럼을 유럽에서 일정기간 추가 숙성 후 병입한 브랜드다. 설탕, 색소, 인공향 같은 첨가물 없이 와인처럼 테루아를 읽을 수 있는 럼을 지향한다. 강화의 어스름한 공기와 닮은 럼 한 잔이었다. 모든 것이 조용히 낮아지던 그 틈, 강렬함보다 섬세함이 필요했던 순간. 그 여운은 꽤 오래 남았다.

4. 정다솜 – “후추 한 알이 거대해지는 순간”

“수많은 재료 중에 왜 하필 후추예요?”라는 질문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농장에서 받은 후추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나 왜 이런 후추밖에 모르고 살았던 거지? 그때 알았죠. 후추는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감각을 넓혀주는 재료라는 걸요.” 그 경험을 나누고 싶었던 마음은 결국 회사를 만들게 했고, 지금 그녀는 캄보디아와 마다가스카르의 후추를 소개하는 오 페퍼(Ö Pepper)의 대표가 되었다. 일정 내내 세 개의 핸드폰과 노트북으로 정신없이 일하던 그녀는 후추를 소개할 때만큼은 열정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님 같았다.

이 날 맛본 후추는 두 가지. 첫 번째는 프레시 그린 페퍼. 캄보디아에서 갓 수확해 소금에 살짝 절인 형태였지만 은은한 짠맛이 입맛을 돋웠다. 우리는 이것을 강화도 바닷가에서 막 잡아 올린 농어회를 곁들여 맛보았다. 그 흔한 초장과 간장 대신. 대신 아주 약간의 소금 그리고 프레시 그린 페퍼 한 알. 농어살은 기름기 없는 단단한 육질이었고 그 위에 올린 후추는 단순한 매운맛이 아니었다. 싱그러움, 은은한 산미, 풀향, 살짝 톡 쏘는 매콤함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청량감까지. 마치 허브 같았고, 꽃 같았다. 간도 딱 맞았고, 무엇보다 복합적인 풍미가 입안에서 터졌다. 조용한 바닷바람과 함께 먹는 그 한 점은 정말 기억에 오래 남는 조합이었다.

두 번째는 발효 레드 페퍼. 붉은 후추를 한 달간 자연 발효해 소금꽃에 저장한 것으로 보이차와 가죽, 흙 내음이 퍼졌다. 입 안에선 짭조름하고 깊은 감칠맛이 피어났고, 와인이나 위스키 심지어 바닐라 아이스크림과도 잘 어울렸다. 후추는 애주가들에게 딱 맞는 안주 같다. 굳이 배를 채우지 않아도 입안에서 터지는 강렬한 풍미가 어떤 강렬한 술과도 절대 밀리지 않고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글을 쓰는 지금도 한 알을 집어 먹자, 그날의 열기와 감각이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5. 김용수 – “꽃과 바다 그리고 노하”

해변의 서퍼인 줄 알았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체구, 느긋한 걸음걸이까지. 알고 보니 그가 바로 노하 라운지의 주인 김용수 대표님이었다. 놀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라운지 곳곳에 피어난 꽃과 식물, 다채로운 색감과 여백의 조화까지. 이 모든 풍경을 그가 직접 가꾸고 심었다는 사실에, 저절로 “저분이요?”라는 말이 나왔다.

펜션이라고 하기엔 분위기가 너무 섬세했다. 마당에는 잎사귀의 그림자가 꽃길처럼 드리웠고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은 살아 있는 풍경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의 숙소는 처음이었다.

“피에트 우돌프를 아세요? 자연 그대로의 식생을 살리는 조경가인데, 그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바로 이 에키네시아래요.” 들뜬 소년처럼 꽃들을 하나씩 소개하며 말했다. “이 꽃들은 지금은 시들어 보이지만,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가졌어요.” 그의 표정에서 이 작은 정원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피에트 우돌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식물은 죽은 뒤에도 아름다워야 한다.” 그 말의 의미를 노하의 정원에서 실감할 수 있었다. 시든 꽃도, 마른 줄기도 이곳에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이 되고 있었고, 붉게 물든 바다와 그 사이를 걷는 사람들까지 더해지니 그림처럼 고요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정원이란 단지 식물을 심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계절, 마음까지도 담아내는 그릇일 수 있겠구나. 이날 나는 오랜만에 마음 깊은 곳에서 평화를 느꼈다.

6. 이세용 – “쉐리, 그 뜨거운 태양 아래서”

전 맥캘란 앰버서더였던 이세용 님은 요즘은 프리한 몸이다. 잠시 위스키에서 벗어나 요즘은 F1 레이싱 시리즈물에 푹 빠져 계시단다. 그 말이 어쩐지 이번에 그가 가져온 술과 잘 어울렸다. Don Gonzalo Oloroso VOS(돈 곤잘로 올로로소 VOS) 드라이한 쉐리와인이다.

쉐리는 단순하지 않다. 와인의 산화 풍미, 숙성향, 견과류와 꽃 내음 그리고 햇볕을 담은 술. 그중 올로로소(Oloroso)는 산소와 접촉하며 숙성하여 더 복잡하고 묵직한 향을 내뿜는다. 이 병은 VOS 등급, 최소 20년 이상 숙성된 진귀한 쉐리였다. 잔을 돌리자 아몬드, 헤이즐넛, 말린 오렌지 껍질 향이 넘실거렸고 짠 바닷바람이 코끝을 맴돌았다.

쉐리를 마시자 입안에 열기가 감돌았다. 차갑지 않은 술인데도 이상하게 갈증이 가셨고 고소하고 달큰한 산화 향은 밀물처럼 천천히 퍼져 들었다. 강렬하고 낯선 맛인데 어쩐지 익숙한 기분.

문득 스페인 헤레즈의 뜨거운 태양이 떠올랐다. 강화도의 햇빛도 못지않게 매서웠다. 피부를 지그시 누르는 열기 속에서 더위는 그저 불쾌한 날씨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감각이 되었다. 오히려 쉐리의 그 따뜻한 기운이 한여름의 공기와 이상하리만큼 잘 어울렸다. 무더운 오후, 시원함 대신 천천히 스며드는 묘한 여운으로 남았다.

7. 정선아 - "나를 위한 칵테일의 시작”

나는 알자스에서 가져온 드라이 화이트 와인, 까뜨린 리스(Catherine Riss)의 와인을 준비했다. 피노블랑과 오세루아의 블렌딩, 청사과와 배 그리고 동치미처럼 맑은 탄산감이 더운 강화의 날씨와 꼭 어울렸다.

하지만 정작 내 기억에 깊게 남은 술은, 홍성인 대표님이 가져온 특별한 아페리티프였다. 이름은 ABC.
Apéritif à Base de Calvados. 말 그대로 칼바도스를 베이스로 만든 식전주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사과 브랜디 칼바도스에, 쌉싸름한 허브와 시트러스 껍질, 엘더플라워 향이 더해졌다고 한다.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ABC를 살짝 부어 마시니 아페롤보다 훨씬 섬세하고, 아마로처럼 깊은 여운이 남았다. 사과의 상큼함과 함께 압생트에서 느껴질 법한 약쑥의 쌉쌀한 향이 입 안을 감돌았다. 무더운 여름날 온몸의 감각을 상쾌하게 해주는 한 잔이었다. 나는 일상이 지루할 때 캔맥주 대신 아마로나 진을 시원하게 말아 마시곤 한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솔솔 피어오르고, 익숙한 공간이 잠시 낯설어지며 기분이 전환된다. 허브, 약초의 기분 좋은 쌉쌀함. 말린 꽃과 과일의 잔향이 겹쳐진 스타일의 술들은 그래서 더 끌린다. 천천히 ‘느끼는’ 술이니까.

도심을 떠나 정원과 바다 사이에서 마신 한 잔은 지나치게 시원하지도 과하게 짙지도 않은 절묘한 균형으로 그 순간만큼은 시간과 공간에서 나를 가볍게 떼어놓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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