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그 진실!
5화 가면 동굴
-두려움, 그 진실!-
등장인물: 루미나, 샘
등대를 나선 그녀들은 모래로 된 흙길을 따라 동굴 쪽으로 향했다. 화산석으로 이루어진 그 동굴은 마치, 가면의 날이 반쯤 모래 속에 파묻힌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처럼...
그녀들은 거대한 구멍을 품은 동굴 앞에 멈춰 섰다.
"꼭 가면 같지 않아요? 옆으로 기울어진 얼굴처럼 보이죠?"
"그렇네요. 한쪽 눈은 모래에 잠겨 있는 것 같아요."
"엇! 샘! 이제야 등대의 역할을 알 것 같아요!"
"엇! 나도요! 같은 생각을 했죠?"
"등대 빛! 가면 눈!"
두 사람은 동시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마주치더니, 신이 난 얼굴로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마치 오래 기다린 퍼즐 조각이 딱 맞아떨어진
순간 같았다.
"그 등대 말이에요. 동굴에 가려서 기능을 못 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가면 뒤에서 동굴 구멍을 통해 뱃사람들에게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마치 동굴의 한쪽 눈으로요."
"오!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루미나, 꿈의 숲 설계자는 가히 천재적이네요."
"그러게요. 설계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재라는 건 부정할 수 없겠네요."
"평소 보던 깊은 동굴은 아니죠? 그냥 쭉 지나쳐도 되겠어요."
샘은 동굴의 끝쪽을 가리킨 뒤, 울퉁불퉁한 화산석을 하나하나 밟으며 휘청휘청 걸었다.
뒤따라 오던 루미나는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몸을 움찔거렸다.
"샘… 이곳에 와 본 적이 있어요."
"언제요? "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어쩜 이렇게 낯이 익는지 모르겠어요. 확실히 이곳이에요! 이곳으로 이어지던 길도 전부 떠올라요. 이 기억... 대체 뭘까요?"
"그야, 나도 모르죠. 루미나의 기억 속에 있는 거니까요."
"꿈! 꿈속에서 여러 번 봤던 곳이에요. 꿈에서 자주 놀러 왔던 곳이라고요!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해변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웅덩이마다 물이 가득 흘러넘쳤고요. 움푹 파인 형태의 바위들이 계단처럼 약간씩 포개져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었고, 그 길을 지나다 보면 이끼로 뒤덮인 작은 돌다리가 나오고, 그곳을 지나면…!"
"그럼 루미나의 꿈의 세계가 이곳 꿈의 숲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거네요. 저도 가끔 그런 경험을 해요. 데자뷔라고 하죠?"
"데자뷔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해요. 기억에 너무 또렷하게 남아서… 마치 전생을 보고 온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어요. 어쩌면 샘도 전생에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죠. "
"윤회 같은 것이군요? 하지만… 미래라, 미래를 본다는 건 결국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잖아요. 저는 그런 말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도 같은 생각이기는 하지만, 오늘 같이 선명하게 보이는 예지몽을 꾸고 나면, 종종 운명이 누군가에 의해 그려졌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또는 전생을 돌고 돌아
이곳에 온 특별한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종종 있어요. 이렇게 선명한 기억들이 떠오를 때면 더욱 그렇고요…"
"지금 느끼는 그 감정과 기억들 참 소중하고 특별하기까지 하네요. 그러니 절대 잊지 말아요. 그곳에서의 소중한 기억들을요."
"샘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예지몽이라… 그런 경험은 없어요. 하지만 루미나가 듣지 못하는 소리를 내가 듣는 것처럼, 나 역시 운명에 이끌려 윤회한 특별한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요."
"이런, 생과 사에 관한 생각을 하며, 수십 년을 헤맸는데 괜히 샘에게까지 생각의 짐을 옮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루미나, 나는 철학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야기들을 배척하지 않아요. 모든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을 담고 있고, 모두의 삶 속에 보이지 않는 특별함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지네요. 고마워요."
"자주 해요. 그런 이야기들 정말 재미있잖아요."
"네! 그럼 걷는 동안 계속 이야기해요."
루미나와 샘은 동굴을 지날 때까지, 꿈속의 대화들을 이어갔다. 동굴의 끝머리에 다다랐을 때, 어디선가 졸졸 흐르는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물줄기 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 그녀들의 앞에는 포트홀 구멍의 수많은 화산석 바위들이 놓여있었다. 모든 바위에서는 어디서 왔는지 모를 바닷물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것 봐요. 그리고 곧 작은 돌길이 나와요. 그전까지는 이 웅덩이들을 안전하게 건너야 해요."
루미나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샘을 바라보았다.
샘은 바위에서 흐르는 물을 살짝 찍어 맛본 뒤, 고개를 홱 돌리고는 침을 뱉어냈다.
"정말 짜요. 퉤~ 퉤~ 역시 바다가 있는 게 틀림없네요! 정말 루미나의 꿈이 이곳에선 현실이 되는 건가 봐요! 루미나의 꿈속 세상이 실제로 존재했군요!"
"음… 그렇게 거창하게 말씀하시니까, 괜히 좀 무서워지려고 해요."
"왜요? 꿈에서 괴물이라도 본 거예요?"
"아뇨, 꿈에서 괴물을 만난 적은 있지만, 날 해치진 못했어요. 늘 크게 소리치거나 괴물을 물리쳤던 기억은 나요. 어느 날은 잠결에 긴 머리 귀신이 뚫어지게 바라보길래, 냅다 머리채를 잡고 흔든 적도 있었죠."
"그랬군요. 그럼 겁내지 마요! 난 오히려 루미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호기심이 생기는데요? 정말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요."
"확실히 처음 봤을 때 보다 말도 더 많아졌고, 자주 웃으시네요. 가끔 화도 내지만요. 하하하. 긍정적인 의미예요."
"음, 그렇죠. 처음에는 극도의 긴장 상태였고,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보이질 않아, 반 포기 상태였거든요. 시간은 흐른 것 같은데 나갈 방법은 없으니, 그런데 루미나 덕분에 이렇게 신나는 모험을 하게 되었어요."
"샘도 곧 꿈을 떠올리실 것 같은데요? 그럼 샘도 항해사님처럼 이곳을 떠나겠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난 루미나와 걸었던 이 길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저도 그럴 것 같아요. 물론 지금까지의 모든 순간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샘과 이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들은 영원히 제 기억의 저장소에 보관되겠죠? 진심으로 그러기를 바라요."
"그럼 정말 좋겠어요."
그들은 구멍으로 빠지지 않으려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웅덩이를 빠져나온 그들은 이끼로 뒤덮인 돌길을 걸었다. 곧이어 그들의 눈앞으로 에메랄드 빛의 거대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한참 동안 말없이 바다 풍경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다의 지평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루미나, 저기 움직이는... 사람이죠?"
"그렇네요. 사람 맞네요."
"혹시 이 장면도 봤어요? 루미나의 꿈속에서?"
"아뇨. 제 꿈은 종종 뒷부분을 자르고 보여주거든요. 물론 꿈의 끝을 보여 줄 때도 있지만, 소설의 열린 결말? 뭐, 그런 것처럼요."
"그렇군요. 음… 가서 인사라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저분들도 숲에 갇혔거나, 이동 중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은데…"
"그러죠 뭐. 가보죠."
그녀들은 해변을 가로질러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루미나는 멀리서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맞은편 사람들도 화답하듯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루미나라고 해요. 그리고 여기는 샘이에요. 저희는 비 오는 길에서 만난 사이예요. 그리고 이곳까지 함께 이동했죠."
"어?! 저 여자분!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까랑까랑하고 발랄한 목소리의 여성은 루미나를 알고 있다는 듯 다가오며 악수를 건넸다.
"저를 보셨다고요?"
"그렇지? 맞아!! 우리 처음에 봤잖아요! 꿈의 숲 열차와 정문에서!!! 맞지? 자기~"
루미나를 알아본 것은 에드와 카일라 부부였다. 부부는 루미나가 반가운 듯 활짝 웃으며, 그녀들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루미나, 처음 출발할 때, 비 오는 길을 혼자 걸어왔다고 했죠?"
"맞아요. 샘, 아무래도 그때 반대편 길로 가셨던 분들인 것 같아요."
"그때, 통성명도 못 하고 갑작스럽게 헤어져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어요. 목소릴 들으니, 이제야 알 것 같네요. 그 연인분들…"
"맞아요! 분명 함께 출발했는데, 갑자기 보이질 않더라고요. 되돌아가 찾아보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맞아요. 처음 선택한 길에서는 되돌아갈 수 없더라고요."
"다시 돌아가려 하니, 왔던 길은 사라지고 없었죠. 무성한 꽃길의 숲만 보이더라고요. "
"네… 그랬군요. 그때, 같이 계셨던 분들은 모두 어디에 계세요? "
"우리는 각자 따로 걷기로 했어요. 걷는 속도가 서로 다르다 보니 이렇게 흩어지게 된 거고요."
"그… 노란 머리 아이가 잘 있는지 궁금했어요."
루미나는 여정 중에도 그 작은 아이가 계속 떠오른 듯했다.
"걱정 말아요. 온 천지가 꽃 밭인데, 위험할게 뭐가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렇게 비가 쏟아지는 길은 몇 년 만인지 몰라요. 오들오들 떨기도 했고요."
"그랬죠. 때론 어두우며 추웠고, 위험하기까지 했죠. 샘과 함께 오두막에서 도망까지 쳤으니까요. 피식—"
루미나는 샘과의 지난 일을 떠올리며 웃음이 새어 나오자,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큭큭거렸다.
그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본 부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아... 정말 힘들긴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까 재미있는 순간들도 있었어요. 살면서 이런 모험이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샘, 그렇죠? 항해사님은 지금 어디쯤
계실지도 궁금하고요."
"그러게요. 항해사님이 갑자기 이곳으로 배를 타고 지나가신다면… 정말 반가울 것 같아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나눠봤는데 말이죠. 하하하."
"두 분은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나요? 그분들과도 각자 걷기로 한 거예요?"
루미나는 그들의 여정이 궁금한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항해사? 그런 분을 만나셨어요? 두 사람이 온 길에선 또 다른 바다가 있었나 보죠?"
"네! 저희는 배를 타고 건너왔는데, 두 분은 아닌가요? "
"저희는 봄 꽃이 무성히 피어있는 길 쪽으로 쭉 걸어왔어요. 그렇게 걷다 보니 해변에 도착하게 되었고요."
루미나와 샘은 서로를 멀뚱히 바라보며, 비 오는 숲에서의 일들을 마음속에 묻어둘지 잠시 고민에 빠진 듯했다.
"아! 그리고 저희는 연인이 아닌, 부부예요. 이쪽은 제 피앙새 카일라고요. 그리고 저는 에드라고 합니다. 이쪽이 샘, 루미나 맞죠?"
“네, 제가 루미나예요.”
"두 분은 오는 길에 만났다니…어머? "
카일라는 갸우뚱대며,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카일라?"
"에드, 이곳은 하루 7명만 들어올 수 있잖아.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이 여기 있을 수 있죠? 샘이라는 사람 말이에요."
카일라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놀란 에드는 카일라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경계의 눈빛으로 그녀들을 쏘아보았다.
"두 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잘 알아요. 저도 처음에 영혼인가 싶었어요. 꿈의 숲에서 잠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보세요!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이잖아요."
루미나는 샘의 팔을 잡아 흔들며 말했다.
에드는 여전히 경계심을 유지한 채 한쪽 손으로 카일라의 손을 잡고, 반대편 손으로 샘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이코~ 죄송해요. 샘. 카일라가 워낙에 심령적인 것들을 잘 믿는 통에 저도 잠깐 덜컹했네요."
"아니에요. 그럴만하죠. 저 역시 꿈의 숲에 왜 갇혔는지 모르니까요. 지금까지도요."
"갇히다니요?… 어디에 갇혔어요? 저런, 다치신 곳은 없나요?"
카일라는 겁을 먹고 경계했던 자신을 까맣게 잊은 채 샘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길을 잃으신 거예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죠? 그냥 쭉 가기만 했어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평소에 호기심이 많으신 편인가요?"
"호기심이라… 호기심으로 목숨을 걸진 않죠. 그런데 그건 무슨 말이에요? 쭉 가기만 하면 아무 일 없이 꿈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요."
카일라는 무언가를 숨긴 듯한 눈빛을 잠시 흘렸다. 그들 사이의 침묵이 무거워지려 할 때, 루미나는 재빨리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 이제 함께 동행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면 각자 길을 떠나는 건가요?"
"글쎄요. 우리는 아마 그동안 해왔던 것처럼, 쭉 가던 길로 가려고요. 안 그래, 카일라?"
"응, 그래요. 우리 쭉 걸어요. 오랜만에 긴 산책을 하니까, 마치 휴가지에 온 것처럼 재미있어요! 나 신나요, 에드!"
샘과 루미나는 부부의 애정 어린 눈빛을 본 뒤, 잠시 쉬어가자고 말하며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잔잔한 파도 소리와 시원한 바닷바람, 그리고 다정하게 걸어가는 부부의 모습이 겹쳐지며, 두 사람은 눈을 감고 조용히 휴식을 취했다.
얼마 후, 눈을 뜬 루미나의 시야로 카일라가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샘, 저기 좀 봐요. 해안에 길이 생겼어요. 보여요?"
"정말이네요. 신비로워요. 우리도 어서 가죠! 루미나."
카일라와 에드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신이 난 발걸음으로 해안으로 난 길을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샘과 루미나도 그 뒤를 따라 신비로운 해안길로 들어섰고, 어둠이 내린 뒤에야 비로소 다음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