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꿈의 숲 04화

4화 섬의 등대

빛을 따라 걷거라!

by 우산을 쓴 소녀
글, 그림: 우산을 쓴 소녀

4. 섬의 등대

-빛을 따라 걷거라!-

등장인물: 루미나, 샘


루미나는 섬 이곳저곳을 살피다 파란 지붕의 작은 오두막을 발견했고, 그녀들은 그곳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여정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했지만, 신기하게도 꿈의 숲 속은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았다.


긴 여정에 지친 루미나는 오두막 안 매트리스 위로 쓰러지듯 누웠고 몇 분인지, 몇 시간인지 알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평온도 잠시, 문 밖으로 비치는 기이한 그림자에 놀라 잠에서 깼다. 깨어난 루미나가 방 안을 둘러보자, 샘이 방 한쪽 긴 책장 앞에서 몸을 웅크린 채 멍하니 창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루미나는, 문을 부술 힘이 충분한 괴물이 왜 밖에서 위협만 하는지 수상하게 여겼다. 조심스레 문 옆으로 다가간 그녀는 두 눈을 감고, 괴이한 형체의 움직임과 소리를 온몸으로 느끼려 애썼다.


그 순간, 루미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잠시 검은 형체와 의식이 하나가 되는 환영을 경험했다. 빛으로 둘러싸인 영혼의 모습으로, 그녀는 어둠 앞에 선 자신을 또 다른 눈으로 선명히 지켜보았다.


곧 루미나의 입에서 천둥처럼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 너를 보았다! 너는 지금 이곳에서 사라진다! 난 네가 두렵지 않다!"

루미나의 목소리는 강렬한 힘을 담은 채 또 다른 세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문 밖에 서 있던 괴이한 검은 형체는 연기처럼 스르르 흩어지듯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샘은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루미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루미나 자신도 모든 일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놀란 샘을 위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한 순간을 함께 받아들였다.


"샘…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아니,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나는 그냥 눈을 감았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당신이 누군지 이제 알겠으니까."


샘은 더 이상 아무 설명도 필요 없다는 듯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마침내 긴 문장을 토해냈다.


"내가 누군지 안다고요? 나는 그냥 나예요. 샘. 루미나요.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뭐… 그런 퇴마사도 아니고… 나는 그냥…"


"안다고요. 그냥 사람이죠. 나처럼 평범한…"


"아… 네… 전 또 오해라도 하실까 봐…"


"걱정 마요.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까."

샘은 마치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듯한 진중한 표정을 지었다.


"꿈의 숲에서는 별에 별 일이 다 일어나죠… 그렇죠? 퇴마라니… 훗!"


"그건 퇴마의식이 아니에요."


"아… 네… 그렇죠. 저는 퇴마사가 아니니까요. 어릴 적에 퇴마에 관한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한 것 같아요. 하하하."


"네…"


"아… 궁금하지 않으시구나…"


"걱정 말라니까요. 이상하게 보지 않아요. 당신의 그 어떤 것도요."


"네네…"

샘의 목소리가 한껏 상기되자, 루미나는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둘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하루를 더 이어갔다. 그녀들은 곧 깊은 잠에 빠졌고, 새벽녘 즈음 샘의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얼른 가요! 빨리요!"


"네? 아니, 지금… 무슨…"


"일어나라고! 당장!"

샘은 다급하게 루미나를 흔들어 깨웠다.


루미나는 비몽사몽, 얼떨결에 샘의 손을 잡고 오두막을 나섰다. 파란 지붕의 오두막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즈음, 황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을

설명하라는 압박 어린 눈빛을 피하지 못한 샘은 잠시 쉬어가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까는 놀랐을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꼭 그래야만 했거든요."


"대체 왜 그런 거예요? 혹시 어제 그 검은 형체가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서요?"


"아뇨… 그냥 어떤 소리가 들렸어요."


"뭐가 들려요?"


"소리요. 대화 소리… 남자랑 여자 대화 소리…"


"그래요? 그런데 왜 도망친 거예요? 아는 사람들이에요?"


"아뇨."


"아니, 그럼 무서워서 그냥 도망친 거라고요?"


"무서워서 도망친 게 아니라고!!!"

계속되는 추궁에 샘은 화가 난 듯 고함을 질렀다.


루미나는 샘이 소리 지르는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은 듯 뒤로 물러섰다.


그렇게 루미나는 샘을 앞서 조용히 걷기 시작했고, 샘도 말없이 그녀 뒤를 따랐다. 둘은 푸른 하늘이 새까만 밤으로 바뀌는 동안 멈추지 않고 걸었다. 은하수가 밤하늘을 수놓을 때까지 그들은 오직 앞만 보며 나아갔다.


"아까…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물어보면 또 화낼 거죠?"


"아뇨. 아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저도 이유는 알아야죠. 그래야 샘이 날 깨우지 않아도 알아서 도망치거나 할 거 아니에요."


"어제… 루미나가 했던 행동 말이에요."


“제가요? 어떤 행동이요?”


“그 있잖아요… 괴물을 사라지게 한 거요… 그 그림자 괴물이요.”


“아… 그건 그냥 이곳의 환상 같은 것 아닐까요? 뭐, 환영이라던지 꿈의 숲이니까 아무래도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요. 안 그래요?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된 거죠. 자각몽처럼… 뭐… 아무래도 꿈같은 말도 안 되는 내용도 보이고, 뭐 그런 거죠.”


“그게 어떻게 환영이에요! 뭔가를 봤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도 나도 봤잖아요! 혼자 속으로 무언가를 했던 거죠? 아니에요?”


루미나는 자신의 무의식적인 행동을 알고 있는 샘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혔다.


“알아요. 내가 모르는 루미나만의 뭔가를 한 거죠? 잘한 거예요. 맞아요. 그건 그렇게 해야만 했던 거죠.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라뇨? 그 괴물들이요?”


“아뇨… 그 괴물은 우릴 해칠 수 없어요. 봤잖아요. 문 앞에서 아무 짓도 하지 못하는 거… 루미나, 당신이 말한 환영처럼 말이에요.”


“그럼, 그 남자랑 여자라는 사람들요, 아직 이 섬에 있어요?”


“아마도 우리가 오두막을 떠나자마자 그들의 배가 도착했을 거예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설마, 전에도 여기 왔었어요?”


“아뇨.”


“그럼 그들을 피해 계속 도망쳐야 하는 거예요? 대체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나도 그들이 왜 당신을 찾는지 몰라요. 다만 소리를 들었어요. 그들이 하는 말들을…”


“언제요? 우리가 오두막을 떠날 때 도착했다면서요.”


“나는 들을 수 있거든요. 누군가의 목소리를…”


“귀가 엄청 밝으신가 봐요. 그 초능력? 이런 건가?”


“그럼 루미나도 초능력자겠네요. 뭐… 퇴마 하는 능력인가?”


“샘, 난 농담한 게 아니에요. 진짜로 신기해서 그랬어요.”


“아니요. 아직 루미나는 자신을 모르니까 당연해요. 알 수 없죠. 나도 그랬으니까. 글쎄요, 이러한 현상들을 지구상에선 초능력이라고 부른다죠. 영화처럼 엄청난 능력은 우리에게 없어요. 다만 우린 느끼고 아는 거죠.”


‘환청인가?’

루미나는 샘을 의심하듯 슬쩍 바라보았다.


“샘,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그래도 돼요?”


“그래요. 물어봐요. 이제 정말 화내지 않을게요.”


“그 남자랑 여자가 나눈 대화내용이 뭐였어요? 우릴 잡아가겠다는 거였나요? 아니면 꿈의 숲에서 내쫓으려는 건가요?”


“아뇨, 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았어요. 제가 들은 소리는 루미나 당신이 그 괴물에게 한 행동에 관한 것이었고, 그들이 당신을 찾는 듯했어요. 제가 도망친 이유는 그들이 당신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뭘 했는지 나도 잘 몰라요. 지금도 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들이 말하기로는 어떤 에너지가 느껴졌다고 했고, 충격파와 비슷하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을 데려가야 한다고도 했죠.”


“어디로요? 저를요? 왜요?”


“그래서 도망치자고 한 거예요.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괜한 위험은 감수할 필요 없으니까요. 안 그래요?”


“네… 그래요. 아무튼 고마워요, 샘.”


“이제 가죠. 혹시 그 사람들이 가까이 왔을지도 모르니까요.”


“네,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는걸요. 앞으로 계속 걷는 수밖에요. 그날처럼…”


“계속 걷다 보니 바다가 보였죠.”


루미나와 샘은 또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한나절 동안 걷던 그들은 마침내 먼 곳에서 기다랗고 가느다란 빛줄기를 발견했다. 그 빛줄기는 사방으로 퍼지며, 아름다운 불빛의 길들을 만들어냈다.


“저거 보여요? 빛?”


“저 빛은 등대의 불빛 같은데요?”


“등대요? 그렇네요! 등대예요!”

샘은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커다란 미소를 띠며, 등대 빛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같이 가요, 샘! 왜 그렇게 뛰어요!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야죠! 초행에 밤길인데!”


“나 먼저 가 있을게요! 천천히 따라와요!”


“그래요! 먼저 가요… 아니, 가있어요!”

루미나는 어두운 산길에 홀로 남겨졌지만, 꿈의 숲을 감도는 밤공기는 여전히 잔잔했고,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신 듯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조용한 산길을 홀로 걸으며, 루미나는 지나온 일을 되새겼다.


문득, 항해사의 웃는 얼굴이 스쳐갔고, 다시금 숲 속에 온 의식을 집중하며, 온전히 그 자리에 머물렀다. 그렇게 걷고 있던 루미나의 눈앞에 어느새 커다랗고 웅장한 하얀 등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오래된 성처럼 고풍스럽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등대 옆으로 난 크고 묵직해 보이는 나무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익—’


등대 안에는 소용돌이 모양으로 휘감긴 돌계단이 놓여 있었다. 어딘가로 이어지는 그 길고 긴 계단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만, 마침내 빛이 머무는 꼭대기에 닿을 수 있을 듯했다.


“샘!! 여기 있나요?”


“네!!! 나 꼭대기에 있어요! 천천히 올라와요!!”


등대의 둥근 원형이 울림통이 되어, 둘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루미나는 엄청난 계단을 바라보고 말문이 막혔지만, 어쩔 수 없이 묵묵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왔어요?! 힘들었죠? 이렇게 커다란 등대 본 적 있어요? 꼭 성의 모습과 닮아 있죠? 나도 이런 곳은 처음 봤어요!”


“후… 후… 온몸이 땀이에요. 아… 난 지금 말할 힘도 없으니, 조금 쉴게요.”

루미나는 등대 창가에 조용히 몸을 기대고 해맑게 웃는 샘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샘, 샘의 꿈도… 바다의 등대지기 뭐 이런 거예요?”


“아뇨, 바다의 등대지기?! 멋지네요. 그렇지만 그런 꿈은 꾼 적 없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좋아해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벅차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지...”


“잘 생각해 봐요. 혹시 또 모르잖아요. 갑자기… 어! 세 살쯤? 동화책에서 읽은 등대지기 이야기… 엄마가… 읽어주던… 동화 속…”

루미나는 말을 다 잇지 못한 채 잠에 들었다.


새근새근 잠든 그녀의 얼굴에는 피곤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샘은 그런 루미나의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며, 조용히 곁을 지켰다.


‘짹짹—’


루미나는 창가로 비치는 따사로운 햇살과 창밖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에 천천히 눈을 떴다. 어제의 피로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아침 공기는 신선했고 등대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눈을 돌리자, 구석진 자리에 웅크린 채로 잠에든 샘의 모습이 보였다.


샘의 얼굴을 바라보던 루미나는 잠시 그녀를 깨울지 망설이다 이내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녀는 숲의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이런 숲에 왜 등대가 있지?”


고요한 등대 안으로 퍼진 루미나의 말소리에 귀가 밝은 샘은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눈을 떴다.


“루미나, 뭐라고 했죠?... 잘 못 들었어요.”


“아… 아니에요, 깨우려던 건 아니고,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등대이야기 한 거 아니에요?"


“네, 샘. 여긴 평범한 숲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이렇게 커다란 등대가 있는 걸까요?


"글쎄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 바다가 있을지도 모르죠."


“어!! 저기 보세요! 엄~~ 청 큰 동굴이 있어요. 근데, 저 동굴… 어딘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어디 봐요.”

샘은 두 눈을 반짝이며, 무릎과 옷에 붙은 하얀 먼지를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샘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고, 그녀들은 함께 창가 밖 세상을 바라보았다.


"샘, 저기~ 보여요? 엄청 커요!"


"아, 그렇네요. 어쩌면 저 동굴 때문에 등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어요. 등대가 먼저 지어지고, 동굴이 생겼을 수도 있고요. 신기하죠, 꿈의 숲은?"


“어? 정말이네요? 등대가 먼저 생겼는데, 그 뒤에 누가 동굴을 만든 거죠! 그래야 이 등대가 설명이 되겠네요. 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 투성이네요. 은근히 재미있어요, 저는.”


“루미나, 가볼래요? 동굴로?”


“글쎄요. 좀 망설여지기는 하는데…”


“왜요? 괴물이라도 나올까 봐요?”


“아뇨! 이제 괴물 같은 거 무섭지도 않아요. 그것 보단… 저 동굴이 좀 특이하게 생긴 것 같아서요. 길을 잃을 걱정은 없겠어요. 무슨… 바구니를 세워 놓은 것처럼 생겼죠? 그리고 저기, 저 동굴에 커다란 구멍 보여요?”


“안심하긴 일러요. 루미나. 꿈의 숲에서 길을 잃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요.”

샘은 처음으로 농담 섞인 말을 하며, 루미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렇겠네요. 방금 그 말, 농담처럼 들리지만 꽤 진지한 말이었어요. 샘"


둘은 가볍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원형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날 피로에 지쳐 계단을 올랐던 것과 달리, 등대를 내려가는 그녀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활기찼다.


keyword
월,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