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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꿈의 숲 02화

2화 비 오는 숲의 영물

함께 걷는 길!

by 우산을 쓴 소녀
글, 그림: 우산을 쓴 소녀

2. 비 오는 숲의 영물

-함께 걷는 길!-

등장인물: 루미나, 탈렌 외 2명


어둑해진 시간과 흐린 날씨 탓에 세콰이아 나무들이 하나둘 사람의 실루엣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무성하게 뻗은 나무들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깊은 어둠 속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사람이다! 엇?... 사람들이 왜 이런 곳에... 꿈의 숲 정원은 하루 일곱 명뿐이라고 들었는데?”

루미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곳으로 다가갔다.


숲 속에는 그녀가 느꼈던 기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어떤 이는 바위 위에 앉아 소리 없는 눈물을 쏟고 있었고,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희망을 잃은 듯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다들 뭐 하는 거예요? 꿈의 숲은 하루 일곱 명만 들어올 수 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갇혔어. 나갈 수가 없어. 계속 비가 와서 춥고 무섭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그는 탈출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에 울음이 멈추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럼 당신은요?”


“나도 모르겠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도통 모르겠어.”


루미나는 더 이상의 대화가 이미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꿈쩍하지 않았고, 그녀는 마지못해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갈 사람들은 같이 가요. 어디든 길은 있겠죠. 쉴 곳을 좀 찾아보든지요.”


수많은 사람들 중 몇몇은 멍한 표정과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루미나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넌, 길을 알고 걷는 거야?”

한 여인이 음침한 눈빛으로 루미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며 물었다.


루미나는 이유 모를 불편함에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꼭 알고 가야 하나요? 초행길인 건 다 똑같죠 뭐. 그냥 가는 거예요. 가만히 있어봐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어디로든 가자고요. 일단 비부터 좀 피해야죠. 밤이 되면, 쌀쌀해질 테니. 산속 기온은 더 차다고요. 서둘러요.”


루미나는 세 사람과 함께 길을 나섰다. 썩 내키지 않는 동행이었지만, 하나같이 영혼이 빠져나간 듯 멍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며 루미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평온... 이너피스... 어쩔 수 없어. 잠시동안 불편하겠지만 일단 걷자.”

예상치 못한 동행은 루미나의 맑은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흔들리는 자신을 다독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숲 속의 길을 따라 서너 시간을 더 나아갔을까. 그들의 시야에 회색 기와집 한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미나는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기쁨과 흥분을 애써 누르며, 조심스럽게 집의 입구로 다가갔다.


“누가 계시나요?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우산이나 비옷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곳은 고요한 정적만이 가득했다.


“이런, 아무도 없나 봐요. 들어가 확인해 볼게요.”

루미나는 앞마당에 잠시 멈춰 서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정말 아무도 안 계신가요? 잠시만 안으로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그곳에선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요한 숲 속, 회색 기와집 앞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루미나는 옅은 오크색 나무 문에 살짝 귀를 가져다댔지만, 여전히 인기척은 없었다. 그녀는 두세 번 더 노크한 뒤,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방안은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어두웠지만, 그들을 위협할 만한 위험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루미나는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서며, 뒤따라오던 사람들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순간, 음침한 눈빛의 여인이 재빨리 루미나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휙 하고 들어섰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들의 눈은 어둠에 조금씩 익숙해져 갔다. 컴컴한 그곳은 간신히 형체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고, 루미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온기를 금세 알아차렸다. 온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조금 더 다가간 루미나는 바닥에 일렬로 누워 있던 형체들이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녀의 뒤로 숨어 따라오던 여성도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연신 비비며, 사실인지 확인하려 애썼다.


루미나는 누워 있는 사람들 곁으로 다가가 나직이 말했다.


“주무시나요?”


정적—


“저는 루미나라고 합니다. 주무시는 건가요?…”

루미나는 아무런 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다시 한번 속삭이듯 말했다.


“주무시나요?! “


정적—


“이런... 도저히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네... 휴...”


누워 있던 사람들은 좋은 꿈이라도 꾸는지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그들의 손에는 예쁘고 고풍스러운 우산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들과 그들의 영물처럼 느껴졌다. 루미나는 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일행들을 한 번 쓱 바라보았고, 누워 있던 수호자들의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우산을 좀 빌리겠습니다. 마을의 영물이라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쳐있어서요. 감사히 잘 사용하고 꿈의 숲 속에 두고 가겠습니다.”

루미나는 두 개의 우산을 차분히 챙긴 뒤 방을 나섰다.


그녀를 뒤따르던 여인 또한 허둥지둥 자신의 우산을 챙겼다. 마치 홀린 듯 마당 쪽으로 달려 나간 그녀는 숲의 어둠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망치듯 사라져 버린 여인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미나는 이내 몸을 돌려 회색 기와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를 집을 향해, 몇 차례 인사를 건넸다.


루미나는 손에 쥐고 있던 우산 두 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우산 하나를 두 남성에게 건넸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일행과 함께 나눌 몫으로 남겼다.


우산을 펼치자,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숲 전체로 은은하게 퍼져나가갔다. 숲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으스스한 기운을 풍겼지만, 우산이 뿜어내는 따스한 빛 덕분에 그들은 안전했다. 어둠에 잠겨 있던 숲길은 환하게 밝혀졌고, 그들은 넘어지거나 다치는 일 없이 밤의 숲 속을 걸어 나아갈 수 있었다.


“꿈의 숲은 정말 알 수 없는 곳이에요. 비가 쏟아지지만 우산을 빌릴 수 있었고, 함께 할 말벗도 생겼고요.”

루미나는 우산을 함께 쓰고 있던 여성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여성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


“말을...”


“…”


대답 없는 여성의 몫까지 채우려는 듯, 뒤따르던 일행 중 한 남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아요! 덕분에 우산을 구했군요. 고마워요! 나도 언젠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좋겠네요. 이제야 조금씩 길을 찾을 용기가 생깁니다.”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죠. 다들 그렇지 않나요?”

루미나가 다시 한번 옆 사람에게 말을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 대신 깊은 침묵뿐이었다.


“거~ 대답 좀 해주시죠. 민망하겠네. 혹시 나라도 이름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저기요~’라고 매번 부르기 불편해서요.”


“네, 저는 루미나입니다.”


“루미나! 나는 탈렌이에요.”


“탈렌, 이곳은 계속 비가 올 것 같아요. 이대로 계속 가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쉴 곳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다들 피곤해 보여요. 대답하기도 힘들어하는 것 같고...”


“나는 괜찮아! 더 걸을 수 있어요! 이 정도 걷는다고 사람 안 죽어. 근데 이 두 사람은 끝까지 말이 없네... 어이, 젊은이,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피죽도 못 먹은 사람처럼 얼굴이 허연 거야? 그런데 자네 참, 한 인물 하는 걸? 오호,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허허허.”

탈렌은 노인이었지만, 말투에서 젊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루미나는 활기를 되찾은 탈렌의 모습에 덩달아 신이 난 듯 보였다.


“탈렌, 보기 좋아요! 기분도 훨씬 좋아 보이고요!”


“내가 저 사람들과 함께 가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 난 노인이라 혼자 걷는 것보다 둘셋이 나을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젊은 친구들도 그렇고, 다들 꿈쩍도 안 하고, 하나는 온종일 울고만 있고, 하나는 누워서 잠만 자고... 나도 어떻게든 혼자 가볼까 했는데, 순간 덜컥 겁이 나더라고... 내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사람들이 죄다 저러고 있으니, 기운이 날 일이 있겠나.”


“그러셨군요. 혹시 어떤 꿈을 찾으러 이곳에 오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음... 사실 그게, 기억이 잘 안 나요. 너무 많은 세월을 지내다 보니, 내가 처음 품었던, 그 조약돌만 한 따뜻한 꿈이 말이지... 그 시절, 어린 내가 바라보던 세상... 루미나, 당신은 기억하나요? 그때의 기억이 아직 남아 있겠지요? 아직 젊은 사람이니 기억날 수 있겠군.”


“저... 저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도 모릅니다. 꿈이란 걸...”


“오! 젊은 친구! 꿈을 꾸며 살아본 적이 없다고요?! 단 한 번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탈렌은 옆의 남성과 루미나의 뒷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꿈을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은 처음 보았어... 아이들은 꿈을 꾸며 자란다고 하잖아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꿈을 찾으러 온 것도 아니고요.”


“예? 꿈의 숲에 꿈을 찾으러 온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어요?”


“그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꿈이라는 걸 어렴풋이 떠올린 적은 있었지만, 희미한 꿈을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


“그럼, 운명이 루미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건지도 모르죠! 우리가 만난 것도 꽤 놀라운 인연이고,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만날 운명이었을지도? 안 그런가요?”


“그건 그렇죠... 뭐.”

꿈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루미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가슴 어딘가 꽉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올라오는 듯했다.


“흠— 후—”

루미나는 평소처럼 안정감을 찾기 위해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 모습을 눈치챈 듯한 탈렌은 자연스럽게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루미나, 내가 어쩌다가 비 오는 길로 들어선 줄 알아요?”


“글쎄요. 저처럼 길에서 선택하지 않으셨나요?”


“그랬군요. 역시, 루미나는 선택을 하지 않아서 이 길을 걷고 있었군요. 난 내 선택이었소. 내 젊은 시절은 잔잔한 풍랑 같기만 했었거든...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요? 예쁘게 포장된 길은 이미 수도 없이 걸어봤어. 무슨 객기였는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계단 앞에 서니, 그저 비를 홀딱 맞고 뛰어다니고 싶은 거 아니겠어? 그래서 얼른 비 오는 길로 펄쩍 뛰어올랐지. 그런데 글쎄,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거예요.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고, 나만 이 길을 걷고 있었어. 그런데 좀 전, 우리가 만났던 그곳에서 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어찌나 반갑던지! 냉큼 달려가서 함께 가자고 소리쳤지만, 오는 사람들마다 의욕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더라고.”


“... 분명, 이 길을 먼저 걸어간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저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느껴요. 기운이라고도 하죠? 길들에 사람의 흔적과 기운이 느껴져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길이라고요. 우리라고 못 갈 거 없잖아요.”


“오오!! 옳거니! 그렇지! 루미나를 만나고 나니, 이렇게 나를 되찾는 기분이 들어! 고마워요, 루미나. 어이! 젊은이! 나 좀 봐봐, 이렇게 당당하게 어깨 쫙 펴고 걸어봐!! 자, 어서 봐봐!! 나를 좀 보래도!”

탈렌의 장난에도 젊은 남성은 무언가에 홀린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앞을 향해 걸었다.


그렇게 루미나와 세 명의 사람들은 다시금 침묵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한없이 내릴 줄로만 알았던 빗줄기도 어느새 가늘어졌다.


네 사람은 말 없는 숲 속의 자연을 음미하듯 그 고요함 속으로 빠져들었다. 숲 속 구석구석, 꽃잎들의 향기와 달빛의 따스함을 느끼며...


그날, 꿈의 숲은 침묵의 여름밤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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