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세계로 가자!
3. 항해의 시작
-또 다른 세계로 가자!-
등장인물: 루미나, 샘, 탈렌(항해사), 젊은 날의 탈렌
거세게 내리던 비는 더 이상 쏟아낼 것이 없다는 듯 고요해졌다. 고요함 속 적막한 시공간을 뚫고, 미세한 파도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이 소리, 들려요? 들리죠! 이 근처에 바닷가가 있나 봐요!”
탈렌은 들뜬 목소리로 일행을 향해 외쳤다.
“엇! 정말요! 그런 것 같기도 해요. 바다의 향기 같기도 하고요!”
루미나와 일행들은 끝없이 펼쳐진 숲을 마침내 벗어났고, 눈앞에 나타난 바다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바다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와 작은 요트 두 척이 모습을 드러냈다.
탈렌은 배를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루미나는 탈렌의 눈에 비친 미세한 떨림과 옅은 미소를 찰나의 스침 속에서 느낄 수 있었다.
“배 타본 적 있어요, 루미나?”
탈렌은 작은 요트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배를 타본 적 없는 사람도 있을까요?”
“그렇네요. 맞아요. 요즘은 배 타는 것도 쉽고, 누구나 탈 수 있죠…”
“탈렌의 어릴 적 꿈이… 배를 타는?”
“아… 오래전 일이에요. 아주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태어났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어요. 물론 부모님도 어딘가에 계셨겠지만, 이 나이가 될 때까지 본 적은 없네요… 뭐, 이제 다 지나간 일이지만요. 그렇게 섬마을 바닷가에서 어린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건 산과 들, 그리고 바다를 뒹굴며 친구를 만드는 일이었죠. 할아버지는 배를 타셨어요. 그리고 제게도 배를 모는 법을 알려주셨죠. 아주 작은 통통배였지만요.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는 나를 커다란 세상에 보내버리고 싶으셨나 봐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한 사람처럼요. 그렇게 뭍으로 올라가 안 해 본 일이 없었어요. 그러다 성인이 되었을 때,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잘 나가던 음악 카페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처음으로 노래라는 것을 부르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음악의 길을 걷게 되었고, 유명 엔터테인먼트에 스카우트되면서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거죠.”
“노래를 정말 잘하셨나 봐요. 스카우트가 될 정도면…”
“그래요. 난 정말 노래를 잘했어요. 내가 발견한 첫 번째 재능이었죠. 우연찮게 정해 놓은 성공을 향해 걷기 시작했어요. 젊은 친구라 나를 모르겠지만, 한때는 정말 잘 나가는 가수였답니다. 허허.”
“음악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음악만 좋아하지, 가수 이름이나 얼굴은 잘 몰라서요.”
“그렇죠. 그런 사람들도 있죠. 그래도 되죠.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럼, 이미 꿈을 이루신 거 아닌가요? 유명한 가수로 성공하셨으니까요?”
“글쎄요… 성공을 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많은 것들을 이루어 놓았지만, 마음 한구석,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그러한 느낌을 잊으려 음악에만 매달려 지냈던 날들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 이 배를 보고 알았어요.”
“배요?… 항해사! 항해사가 되고 싶으셨던 거예요?!”
“너무 거창한가요? 하하, 조금 부끄럽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어릴 적 매일같이 상상했죠. 커다란 배에 사람들을 가득 싣고 바다를 누비는 항해사가 되어!… 배부른 망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어렸고… 살아가야 했으니까…”
“이제 항해하실 일만 남은 거네요. 이미 모든 것을 이루어 놓으셨으니…”
“그렇군요. 내가 꿈의 숲으로 온 것은 어릴 적 꿈을 찾기 위함이었으니, 드디어 자유롭네요. 고마워요, 루미나. 당신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올 용기도 못 냈을 거예요. 난… 잊었어요. 순수한 꿈을 모른척했고,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어요.”
그의 주름진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함께해 주신 덕분에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게 되었는걸요. 자, 그럼 이제 어떻게 이곳을 나가죠?”
“루미나는 꽤나 냉철하네요.”
그는 머쓱한 듯 눈물을 훔치고는 배에 올라, 일행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봐요! 내가 조작하는 법을 알려 줄게요! 어떻게든 연습해 보죠! 함께 왔으니 함께 건너가요!”
“내일까지 익힐 수 있을까요?”
“그럼요! 난 좋은 스승이자, 위대한 항해사니 까요.”
그의 눈빛과 음성은 꼭 어린아이의 청량한 멜로디 같았다.
”음… 꿈이란 것은 젊음을 되찾는 것이구나. “
루미나는 그런 탈렌의 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이리 가까이 와서 이야기해요!”
“아!!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이에요…”
루미나는 웃으며 탈렌이 타고 있던 작은 배 위로 올랐다.
탈렌은 반나절 요트를 운전하는 간단한 조작법들을 알려주었다.
루미나는 몇 번의 시도만에 요트를 운전하는 법을 익혔고 해가 떠오를 무렵, 능숙하게 배를 다루고 있었다.
“이제 혼자 해도 되겠어요!! 훌륭해요! 난 몇 날 며칠 혼나가며 배웠거든요.”
“배 운전에 재능이 있는 건지… 그럼 배를 타야 하나…?”
루미나는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루미나!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요. 일단, 뭍으로 가서 일행들을 얼른 데려오죠!”
“네!! 항해사님.”
그렇게 탈렌과 루미나는 두 명씩 짝을 지어, 새로운 여정을 향해 배에 몸을 실었다.
“루미나, 걱정 말아요. 내가 앞에서 천천히 이끌 테니까, 뒤 따라오기만 해요. 두려워하지 말아요. 꿈의 숲에서 사라진 사람은 봤지만… 죽은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든요!”
“에?! 죽은 사람이요? ”
탈렌의 말에도 뒤에 앉은 두 사람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자! 이제 항해를 시작합니다!!! 루미나!! 당신의 첫 항해예요!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르는…”
탈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숫자들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37°37’ 22”N 127°02’ 28”E‘
“응? 저건… 좌표 아닌가요?”
“북위 37도 37분 22초, 동경 127도 2분 28초… 저곳으로 가야 하나 봐요! 걱정 말아요! 이 항해사를 믿어요, 모두들!”
루미나는 하늘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숫자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구름처럼 떠 있던 숫자 조각들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광경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졌고, 앞으로 펼쳐질 항해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두 대의 배가 동시에 출발하자, 루미나는 탈렌의 배를 따라 움직였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눈과 머리카락을 스치며, 진한 대자연의 향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출렁이는 바다와 시원하게 달리는 보트 위에서 한참을 달리던 중, 탈렌의 보트가 서서히 멈추더니, 멀리서 손짓하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루미나는 탈렌의 손짓을 보고 그의 곁으로 다가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이에요?”
“죽었어…”
“네? 누가 죽어요?”
탈렌의 보트에는 함께 타고 왔던 젊고 잘생긴 남자가 차갑게 식은 채로 누워 있었다. 그의 완벽해 보이던 외모는 이제 생기를 잃어버린 듯했다.
“아… 아니, 어쩌다가… 평소 지병이 있으셨나 봐요…”
“아니야… 꿈의 숲에서는 단 한 명도 죽은 사람이 없다고 들었어. 만약 이곳에서 죽는다면, 사람들은 애초에 꿈과 목숨을 맞바꾸지 않을 거야!”
“맞아요. 그렇네요. 생각해 보니, 숲길에서 만난 그분들, 탈렌도 그렇고 며칠씩이나 그곳에 있었다면서요. 저도 하루가 지났지만, 전혀 배가 고프지 않고, 목도 마르지 않았어요.”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을 있었던 기분이야. 날짜가 어떻게 가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곳의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우린 알 수 없어. 그런데 왜 하필 여기까지 와서 죽은 걸까?”
“아까도 말씀드렸는데… 지병이나 심장마비 같은 거요…”
“자… 잠깐만… 이 얼굴… 이 얼굴!!”
“네? 얼굴이 왜요? 잘생겼다고요? 연예인이라도 돼요?!!!”
“아니… 내 얼굴… 아… 니…”
“음… 항해사님 얼굴하고 닮긴 했는데…?”
“내 젊었을 때 얼굴이야! 내가 한창 성공가도를 달릴 때, 많은 여성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바로 나!”
루미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정말이야! 이 친구, 이 사람이 바로 나라고!”
“아… 네… 그러니까 항해사님 말씀은 저 사람이 항해사님 젊었을 때 모습이고, 지금은 죽어 있는 거네요. 그렇죠?”
“루미나, 찬찬히 봐요. 이 꿈의 숲은 너무나 어려워요. 난 방금 꿈을 찾았는데, 내 젊음은 왜 이곳에 누워 있는 거죠?”
“음… 그것도 죽은 채로… 입술이 하얗게 질렸네요. 그래도 정말 잘생긴 얼굴이에요.”
그녀는 젊고 잘생긴 그의 얼굴을 감상하듯 한참을 바라보았다.
“루미나! 제발 내 말에 집중을 좀 해요! 이 젊은이를 계속 배에 싣고 다닐 수는 없는 거죠? 그렇죠? 그것도 내 얼굴을 한 이 젊은이를… 바다에 그냥 버릴 수도 없어요!”
“그렇죠. 음… 영화에서 본 것처럼, 용맹하게 싸운 전사들을 배에 실어 보내 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러니 섬에 도착하면, 그렇게 보내주는 게 어떨까요? 아마도 항해사님께서 꿈을 되찾으셨으니, 그때의 젊음을 놓아주는 시간을 갖는 거죠.”
루미나는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그런 장면이 멋있지…”
“그럴 수도 있죠. 난 젊은 시절 운이 좋아 빠른 성공가도를 달렸고, 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앞만 보고 살았어요. 그런 그때의 나를 이렇게 바라보니, 가슴이 참 먹먹하네요. 그때의 나도 참 열심히 살았으니까요.”
“이미 알고 계시네요. 보내야 할 것은 젊음이 아니라, 탈렌이 지나온 과거의 아쉬움이라는 것을요. 이제는 항해사로서 제2의 인생을 살아가실 테니까요.”
“그래요, 맞아요. 난 알면서도 그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는지도 몰라요. 이 젊은 친구를 이제 보내줘야겠어요.”
“섬에 도착하면 저희 배에 실어 그를 자유롭게 보내 주세요. 바다를 항해할 수 있도록요. 그리고 항해사님도 배를 타고 떠나실 거죠?”
“그렇죠! 당연하죠! 그런데 루미나, 당신은 어쩌려고 해요? 배를 주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을지 모르는데?”
“저는 이 배를 가지고 있어도 항해사님이 길을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랍니다. 오히려 섬에 표류하는 게 안전한 선택일지도 몰라요.”
“루미나를 두고 가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는 않네요.”
“걱정 마세요. 제가 이곳으로 온 이유가 어딘가에 있겠죠. 탈렌이 꿈을 찾으러 온 것처럼요.”
“그래요, 그럼. 일단 섬으로 갑시다! 이제 전속력으로 달려 봐요!”
탈렌의 얼굴에는 다시금 옅은 미소와, 자신의 젊음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미나 역시 마음 깊은 곳에서 ‘설렘’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렸다.
동이 틀 무렵, 그들은 한적한 한 섬에 도착했다.
“루미나, 꼭 꿈을 찾길 바라요. 우리 악수 한 번 할까요?”
“네… 이제 어디로 가시려고요?”
“난 항해사니까, 배를 타고 길을 떠나야죠. 이제야 길이 보이네요. 행운을 빌어요, 루미나!”
“아! 네! 그럼 저희도 배는 여기 두고 갈게요. 정말 감사했습니다, 항해사님!”
탈렌은 자신의 배와 또 다른 자신이 누워 있는 배를 서로 연결한 채,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루미나는 언덕 위에 서서 멀어지는 두 척의 배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 배 위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무지갯빛으로 빛나던 무언가를 가만히 지켜보던 루미나는 조용히 몸을 돌려 다시 숲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루미나는 남은 일행에게 다가가 말했다.
“저기, 혹시 꿈을 찾게 되시면… 가셔도 돼요.”
“네…”
“저, 이름은 어떻게 되세요?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몰라서요. 계속 ‘저기’라고 부르기도 그렇고, 혹시 급한 상황에서 ‘저기요!’ 하기도 애매하네요. 하하…”
”내 이름?… 하… 샘이에요. “
루미나는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긴 대답을 들었고, 그녀를 향한 미심쩍던 두려움이 차츰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샘... 저는 루미나예요! 루미나. “
”네…“
짧은 대답이 오간 후, 그들은 다시 침묵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미나는 샘과의 불편한 섬 생활이 시작됨을 알리는 무언의 종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들의 새로운 섬 생활의 막을 올리는 하늘의 종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