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ramram Jan 25. 2022

잘 살아간다는 것

매년 바구니에 나이가 쌓일 때마다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 답의 근사치는커녕 뜬구름만 잡는 내 모습을 보기도 하는데 이런 반복을 계속하면 언젠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잘 사는 것에 대해 고민을 한 건 군 전역하기 직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되지?’라는 일종의 겁으로부터 시작된 고민이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의 겁은 서른 이후에 생기는 겁과 비교해서 그리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회에서 겉돌고 떠도는 자체에 겁이 많이 났다면 그렇게 무턱대도 일본으로 떠나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상주의에 찌든 낭만파였는데, 23살에 내가 생각한 ‘잘 살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주위 사람들의 신경을 안 쓰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매듭을 지었다. 그래서 그때 당시의 결론은 일본에서 10평짜리 한식당을 차려 조용히 살아가려 했고, 그렇게 내 일본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실 일본으로 간 건 어떤 것으로부터 피하기 위한 도피의 개념이었다. 지긋지긋했고, 지쳐있었고, 단절이나 유배의 개념과도 통한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일본 생활이 본인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보다는 이제 내가 그 어떤 무언가에 속해있지 않다는 해방감을 시작으로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생각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들었다. 

 물론 인사만 할 줄 아는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 일본 땅을 밟은 지 3일 만에 신문배달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육체적인 고됨은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것이라고 허세만 가득한 철부지였기 때문에, 몸이 힘든 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1년 넘게 그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가끔 나 자신에게 질리기도 한다.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 반부터 오전 6시 반까지 집집마다 330곳에 신문을 돌렸고,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는 일본어학교, 점심 먹고는 석간 배달업무도 있어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200부 정도 돌렸다. 내가 하루에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일과는 이렇게 세 가지뿐이라 단순할 수도 있는 생활이었지만, 새벽 2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기억을 다시 회상해보니 끔찍한 하루였던 건 분명하다. 일주일 중에는 일요일 하루를 쉬었는데, 그마저도 석간 업무가 있어 사실 쉬는 날이 없었다. 

 이때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존심 하나만으로 배가 불렀다. 아마 무식해서 그랬을 것이다. 

 “어이 신 군, 괜찮다면 매주 쉬는 날을 일요일로 좀 해주겠어? 일요일은 석간 배달 업무를 해야 해서 그때 쉬려고 하는 사람이 없어서 말이야” 내가 있던 신문사 사장이 유일하게 한국인이었던 내게 정중히(?) 부탁을 했다. 

 한국이었다면 나는 “뭐야,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 대답했겠지만, 일본에서는 그냥 “알았다”라고 짧게 말하고 말았다. ‘한국인들이 얼마나 강하고 부지런한지 보여줄게’라는 대단한 우월감 하나였는데, 이 우월감은 쉬는 날 오후에 배달 헬멧을 쓸 때마다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걸 후회하곤 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일본에 있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건 2평짜리 기숙사에서 혼자 책을 읽는 것뿐이었다. 평생 동안 책과는 그리 친하지 않았던 나 자신이었지만, 성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그렇게 일본에서의 생활이 6개월쯤 지났을 때였을까. 내 인생에서 꽤나 묵직한 고민들이 하나씩 생기기 시작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심도 있는 질문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최대한 현실적으로 접근해서 내가 도달할 수 있는 삶인지, 이상적인 거품은 빼고 구체적으로 그려보았다. 그러고는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공부를 더 하고 싶다’였고, 그렇게 남들 졸업할 시기에 나는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공부가 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조금의 가식조차 없이 솔직히 내 마음을 전한다면 가방끈에 미련이 있던 것도 사실이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남들 시선에 개의치 않겠다고 나 자신과 굳은 약속을 하며 대학 따위는 내게 필요 없다고 자신했지만, 결국 내 판단과 약속들은 3년, 4년도 채 가지 않고 무너진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은 것만으로도 하류 인생을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그렇게 남들 눈에만 살고 있는 존재의 나 자신을 발견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러운 변화인 건지, 일본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변한 건지, 어느새 현실에 타협할 줄 인간이 되어있기도 했다. ‘대학 가서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좋은 직장 다니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돈 많이 벌면서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그러고 마지막 타협은 ‘행복하지 않은 거 하면서 행복 바라도 돼...’였다. 결국 결말이 우울해질 것이라는 예감은 있었지만, 어찌 살든 신문배달부의 인생보다는 나았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졌던 것 같다.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냐는 듣기 좋은 말들도 세상에 울려 퍼졌지만, 내게는 그런 말들이 달콤하지 않았다. 발렛파킹을 맡기며 차 키를 바닥에 던지는 사람들, 술집 서빙 아르바이트생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차는 사람들,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그때부터 마치 인생에서 우위에 있다는 착각으로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까지... 내게 쌓였던 흉터들을 통해 스스로 깨달은 건 단 한 가지였다. 

 “난 평생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런 쓰레기 같은 대접을 받아야 되지?”

 어설픈 자격지심의 행패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은 일방적인 방식의 교류에 신물이 나기 시작했고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정상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자칫 익숙함에 속아버려 벌레 취급을 받는 것도 적응이 되기를 기다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좋게 넘어가기엔 내 성질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새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도 들어가 정상적인 대우를 받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채웠지만, 나는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남들 시선을 쓰지 않기 위해 발악했던 20대 초반의 모습을 다시 비추고 있다. 막상 내가 원했던 ‘사람대접’을 받고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배가 부른 것인지, 그때 내가 남들 시선을 이겨내고 일본에서 혼자 하고 싶었던 한식당을 차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해 미련이 남았을지도 모르겠지. 내 지금의 삶이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괜찮은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회상을 통해 과거에 젖어드는 것도 과거에 대한 일종의 후회일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 구석에는 어느새 집 나간 무언가의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때는 행복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또 무엇이 문제일까... 후회일까 단순한 지루함일까


이미지 출처 :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나 이제 진짜 '백수'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