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한 생각을 할수록 조금씩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도 했고, 여전히 나를 갈팡질팡하게 했다. 생각과 심적인 부분만으로 쉽게 접근하는 것조차 내겐 어려운 일이었는데, 아직 내가 성숙하지 않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지끈지끈 쑤실 때쯤 나는 가장 먼저 부모의 반응이 궁금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고 대뜸 부모님 집을 찾아갔다.
“아부지, 엄마. 나 결혼할까?”
매번 내가 사소한 어떤 말을 해도 관심을 잘 보이시는 부모님이었지만, 이날 두 분의 반응은 얘기하는 사람이 얘기할 맛 나게 리액션을 선보이셨다.
“누구랑? 지금 만나는 애랑? 언제? 얘기된 거야?” 성격 급한 우리 엄마는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이미 수십 개가 준비돼있을 것이다. 아버지도 조용히 막걸리를 들이켜는 것을 보니 입이 간지러우셨겠지.
“네. 얘기는 조금 더 하긴 해야 되는데, 내년 봄쯤?” 예식장을 예약했다는 얘기까지는 너무 잘 익은 김칫국 같아서 섣불리 꺼내지 않았다.
“그 아이도 괜찮다고 해? 어리다고 하지 않았어?” 언젠가 한 번쯤 지금 만나는 친구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는데, 기억을 잘하고 계셨다.
“응. 26살. 얘기는 잘 되고 있어요.”
“어떻게 만난 아이라고 했지?” 드디어 아버지도 대화에 참여했다.
“대학에서요. 안 지는 4년 됐고, 만난 지는 2년 좀 안 됐어요”
허구한 날 말썽을 부리던 막내아들이 결혼 얘기를 꺼내니 실감이 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어느새 시기가 되었다는 걸 알려주듯 부모님의 머리카락들은 하얗게 물들어있었다. 학창 시절 때 하나 둘 뽑아드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순간적으로 괜히 마음이 애틋해지기도 했다. 우리 엄마, 아빠도 늙으셨구나.
농담이었겠지만, 어렸을 때 한 번씩 우리 엄마는 내게 “일찍 결혼해야겠네?”라는 말을 건네곤 했다. 이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다고 하셨다. 매번 어린아이들을 보기 위해 명절 때마다 친척집에 가자고 떼를 쓰고, 내가 7살 때쯤 한 번은 모르는 아이를 집에 데려와서 밥을 먹이고 있었다는 얘기도 하시며 한 번씩 엄마를 놀라게 했다고 했다. 물론 요즘 같이 아내에게 모든 결정권이 있는 시대에서 아이 때문에 결혼하겠다는 정신 나간 남자는 없겠지만 말이다.
“근데. 아부지. 내가 형보다 먼저 결혼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6살 터울 형의 생각을 해야 하는 것도 기본적인 도리라 생각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뭐 그런 거를 신경 써”
“그래. 상관없어. 네 형이 언제 결혼할지 알고” 엄마까지 거들었다.
어쩌면 부모님은 형의 결혼에 대해 이미 마음을 놓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 3년간 연애했던 형도 장남으로서 결혼에 대한 그림을 그려놓았지만, 상대방이 간호사라는 이유 하나로 우리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고, 결국 결혼식까지 다 잡은 상황에서 뒤집어졌으니 형에게도 결혼은 이제 지긋지긋한 문제일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의 결혼을 격하게 반대하는 장면들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일인 줄 알았지만, 내 주변에서도 존재하는 흔한 일이라는 사실을 그날 깨달았다. 또 깨달은 점이 있다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의 결혼은 두 사람의 사랑으로 하는 결혼이 아닌 두 집안이 하는 결혼으로 느껴져 결혼이 이래서 어렵구나 라는 생각을 깊숙이 새기게 되었다.
“근데 아들.” 엄마는 내 맥주가 비어있는 걸 알고 하나를 새로 갖다 주셨다.
“응?”
“이제 결혼하면 남자는 여자를 평생 공주처럼 떠받들며 살아야 돼. 그리고 너는 못생겼으니까 더 그래야지”
“엄마가 낳았잖아”
“그래도 우리 아들은 살긴 잘 살 거야. 내가 걱정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아버지가 어울리지 않게 따듯한 말을 건넸다.
살면서 내게 가장 큰 축복이 하나 있다면 부모님은 내가 뭘 하든 응원해주셨다는 점이다. 그게 금전적 지원을 포함한 응원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감사한 건 묵묵히 기다려주셨다는 점이다. 대학을 안 간다고 했을 때도 “네가 뜻이 있겠지”, 일본에 간다고 했을 때도 “네가 꿈이 있겠지”, 해외 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도 “네가 생각이 있겠지”, 좋은 직장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도 “네가 계획이 있겠지” 별다른 이유를 묻지 않으셨다. 내 고집을 꺾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미리 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은 여쭤보기도 했다.
“아부지. 아부지는 왜 나한테 채찍질을 안 하셔?”
“네가 알아서 잘하잖아”
아버지는 내가 중 3 때부터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선 생각하셨다고 했다. ‘이 놈은 직접 간섭 안 해도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라고. 그 후에 내가 공부를 안 하든, 새벽에 어떤 일을 나가든 엄마의 간섭이 시작되려 하면 중간 타협자의 역할은 늘 아버지의 몫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조금은 그려진 내 결혼계획에 대해 부모님의 반응은 ‘적극 환영’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과정의 갈등과 문제는 접어들지도 않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뜻대로 될 것이라는 확신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자리를 치우고 있는 엄마는 내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넸다.
“그래도 사랑이 제일 먼저여야 한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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