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막내시절, 퇴근을 앞두고 있다 보면 등골이 갑자기 서늘할 때가 있다.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들어맞았는데, 그런 느낌은 항상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저녁에 자리 한 지도 오래됐다.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할까?”
내 정확한 기억으로는 2주 전에 자리를 함께 했는데, 능구렁이 같은 선배의 연기에 하마터면 속아 넘어갈 뻔했다.
“아.... 그게...” 빨리 적당한 핑계를 대야 했지만, 그동안 이미 수십 가지의 핑계를 대 버렸으니 날이 갈수록 머릿속은 뒤엉켰다. 대표적인 핑곗거리는 ‘와이프랑 저녁 먹기로 했다’, ‘다른 출입처와 약속이 잡혀있다’, ‘전날 과음해서 오늘은 힘들다’, ‘장인어른이 집에 오셨다’ 등인데, 돌려막기로 거짓말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새 내 연기가 어색해지기도 한다. 그러면 하는 수 없이 술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는 불상사가 발생해버린다.
그래도 동기 중에서는 내가 술자리 거절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내 동기 중에는 거절한다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극도로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는 순수청년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뜬금없는 저녁 번개 자리 제안이 들어오면 기존에 있던 약속마저 취소하고 참석하기도 했다.
“처음에 습관을 잘 못 들였나 봐. 이제는 단 둘이서라도 마시자고 한다니까?”
“아니, 선배들이랑 술 마시면 재밌어? 나는 아빠가 성묘 가자고 하는 것보다 더 가기 싫던데?” 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동기도 있는데, 이 친구도 매번 기막힌 핑계들을 대며 선배들의 술자리 제안을 정중히 철저히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맞아. 재미라도 있으면 가지. 가서 술 따르고 고기 굽고, 어색한 웃음 짓느라 입술에 경련만 일어나는데, 우리가 무슨 리액션 자선단체냐?”
나는 이런 착한 동기들에게 짓궂은 장난치는 걸 좋아했는데, 내가 어쩔 수 없이 선배들과 저녁자리에 참석하면 물귀신 작전을 통해 걸고넘어지기까지 했다.
“아! 잘됐네요. 제 동기들도 저녁에 약속 없다고 하던데, 같이 가겠습니다!”
그러고 돌아와서는 “선배들이 너희 꼭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어쩌지...?” 카톡으로 수줍은 망설임을 전달하면 동기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아.... 그러면 가야죠 뭐, 어떡해” 답장을 하곤 했다. 술자리가 시작되자마자 내 작전은 들통나버리지만, 그럴 때마다 동기들이 원망과 욕이 섞인 눈초리를 내게 쏟아내는데 따분할 수 있는 저녁자리에서 그게 내 유일한 낙이다. 내 인성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니 선배들도 참 끈기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수십 번을 거절했는데도 매번 아무렇지 않게 도전하기 때문이다. 일하면서 깨달은 점 중 하나가 있다면 ‘가장 좋은 선배는 후배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물론 일적인 면에서는 잘못된 점을 엄격하게 혼내야 하는 선배이고.
퇴사하고 한, 두 달 언저리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평범한 것이 황홀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중 하나는 고요하고 평온한 밤이다. 재미없는 저녁 술자리가 올 때마다 밤도 따라 싫어지기도 했는데, 이제 밤이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 일상에 접어들다 보니 내게도 조금씩 그 ‘적적함’이라는 게 스며들고 있다. 밤이 안주라는 명분 삼아 혼자 맥주를 마시거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내가 그동안 그리워하고 있던 게 이렇게 사소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또 최신 드라마를 생각하면 ‘시크릿 가든’을 기억하고 있는 내가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에 빠져있고, 남들이 드라마 얘기를 할 때마다 ‘할 게 그렇게 없냐’는 속마음을 내뱉던 내가 이제는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수준이 높았었단 말이야?”라는 생각으로 K-자부심에 혼자 취해있기도 한다.
한 번은 아내와 함께 아무도 없는 어두운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아내가 말을 걸었다.
“하늘 좀 봐. 오늘 별 왜 이렇게 많아?”
‘도시에 별이 많아 봤자지’하는 생각으로 처음엔 아내를 의심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치켜올리자 나는 그녀의 ‘많음’의 기준이 나와 비슷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수십 개의 별이 펼쳐진 밤하늘에서 내가 별을 본지가 언제였는지, 멋진 광경으로 위로받은 지가 언제였는지 문득 분위기에 취해버렸다. 아마 일을 하고 있었다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운석이라도 떨어져서 기사거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천문학교수들도 미리 안면을 터놓을까?’ 등의 생각으로 나라는 인간이 속물의 인간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겠지. 그렇게 한동안 추위를 잊은 채로 가만히 서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밤이 부드러울 때마다 산책하고, 드라마를 보고, 글 쓰고, 아내와 맛있는 것을 먹고... 참 별 거 아닌 밤의 시간들인데, 지금 내가 가장 아끼는 순간들이라는 걸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참 사소한 것들이었는데, 그때 난 왜 소홀했고 예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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