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 시인은 1941년 서울출생,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1975년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 1981년 <반달곰에게>라는 시집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시인이다.
살펴보면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들이고
나의 아들의 아버지이고
나의 형의 동생이고
나의 동생의 형이고
나의 아내의 남편이고
나의 누이의 오빠이고
나의 아저씨의 조카이고
나의 조카의 아저씨이고
나의 선생의 제자이고
나의 제자의 선생이고
나의 마을의 예비군이고
나의 친구의 친구이고
나의 적의 적이고
나의 의사의 환자이고
나의 단골 술집의 손님이고
나의 개의 주인이고
나의 집의 가장이다.
그렇다면 나는
아들이고
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남편이고
오빠고
조카고
아저씨고
제자고
선생이고
납세자고
예비군이고
친구이고
적이고
환자이고
손님이고
주인이고
가장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다.
관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시:<나>전문 / 김광규시인
최근 <금강경>을 자주 읽으면서, 조금씩 일상의 사유에 변화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우선 나와 남이 다르지 않다는 인식의 변화가 조금씩 생기는 것 같습니다. 길을 가다 우연히 지나가는 노파를 보면 어머니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거나 지나가는 중년의 여인들을 보면 아내를, 카페에 앉아 있는 젊은 남녀를 보면 아들이나 딸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린 아이들을 보면 딸과 아들의 어렸을 때 모습이 떠올라 혼자 미소 짓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오늘 오래전에 좋아했던 김광규 시인의 시집 <반달곰에게>를 다시 펼쳤습니다. 그 중 <나>라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혼자만의 나가 아니라 <나>는 우리의 공동체의 소시민의 다양한 모습의 <나>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인의 시집에는 각자의 아집으로 굳어진 속물 근성적인 이기심의 사회 풍속을 <나>를 통해 디테일하게 드러냄으로써 비판적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즉 중산층의 속물근성과 현실타협성의 사회 풍속을 진지한 구어체적인 산문으로 묘사하여 시적효과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작은 사내들>에서 매일 작아지는 우리 이웃들은 모두 나와 같은 동일체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소시민은 귀가하는 <저녁 길>에 더 이상 날(飛) 생각을 한지 이미 오래 된 파충류처럼 변했다고 말합니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 모두들 앉으려고 앉아서 졸며 기대려하는 것은 피곤해서가 아니라 돈벌이가 끝날 때 마다 퇴화하고, 온 몸에 피가 식고 비늘이 돋아난 파충류처럼 차갑게 변한 채 매일 저녁 늪이 된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넥타이를 매고 보기 좋게 일렬로 서서 작아지고/모두가 장사를 해 돈 벌 생각을 하며 작아지고/ 들리지 않는 명령에 귀 기울이며 작아지고…….중략…….칵테일파티에 가서 양주를 마시며 작아지고/이제는 너무 커진 아내를 안으며 작아진다.”-<작은 사내들>부분인용
우리 소시민들은 내 돈 내 재산 과 나의
명예에 집착하며 작아지고, 인연에 의해 연결된 무수한 나와의 관계를 연결하며 작아집니다. 그런데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 것을 안다면, 집착이 없게 되고 나와 관계 된 모든 인연과 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어 참 나를 얻게 되고, 이 형상 없는 참 나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되어 곧 부처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광규 시인은 우리 사회의 주류세력을 이루는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나>가 사회의 변혁을 꽤하는 공동체의 <나>임을 독자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혼자만의 나가 아니라 공동체 즉 일합상一合相의 <나>를 사회적 리얼리즘이라는 서술적 이미지로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은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寓意우의적 표현을 주로 구어체로 담담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가볍게 읽혀지지만, 오히려 독자들은 시인의 이러한 시적 진술에 거부감 없이 친숙함을 느끼게 되며, 시적인 울림의 깊이와 파동은 매우 크게 전해집니다. 이러한 시인의 인식은 <나>라는 자폐적 성향의 아집 속에 빠진 우리 시문단에 우리시의 지평을 확대한 시인으로서 독자들이 쉽게 시에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니라 하나이듯 너와 나, 번뇌와 보리, 재앙과 축복 또한 둘이 아닌 하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약세계 실유자 즉시일합상 여래설 일합상 즉비일합상 시명일합상(若世界 實有者 卽是一合相 如來說 一合相 卽非一合相 是名一合相- 만약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라면 곧 한 덩이리의 모양이니, 여래께서 설하신 한 덩어리의 모양도 한 덩어리의 모양이 아니고 그 이름이 한 덩어리의 모양입니다.)” 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일합상一合相 이라는 관념은 부처와 중생도 하나이고, 세계와 나도 하나이며, 진리와 비진리도 하나이며, 적과 아군도 본래 나와 같은 하나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인간들은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분별심分別心에 의한 집착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둘이나 혹은 그 이상의 각자 서로 다름을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2024.09.01./김승하/kimseon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