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정인 시인의 <둥근 물집>
우정인 시인의 2024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인 「둥근 물집」은 사랑의 상처를 지닌 한 여인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상상만으로 과일가게 사내를 몰래 흠모하는 마음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산문체로 가볍게 읽히지만, 행간 속에는 많은 이야기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 시 「둥근 물집」에서 사과와 둥근 물집은 감각적 이미지와 심리적 상태를 동시에 담고 있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사과 한 알이 열매를 맺기까지 담긴 시간과 인내는 곧 인간관계의 깊이와 성숙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일가게의 사내를 보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라거나 "오래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라는 상상은 그녀만의 섣부른 상상이지만, 오래된 아픔을 불러오는 기억으로 곧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라는 상상을 불러오게 됩니다.
둥근 물집은 익지 않은 과일처럼 새로운 감정이 피어오르려 할 때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둥근 물집」은 단순히 사랑의 열망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성숙과 고통, 미완성의 감정이 남긴 흔적을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라는 상상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적 반응처럼 보이지만, 이는 과거의 상처받은 경험으로 인해 고통을 피하려는 방어 기제일 수 있습니다. 「둥근 물집」은 그저 물리적 상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사랑에서 겪었던 아픔과 감정적 상처가 아직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음을 상징합니다.
둥근 물집과 사과의 이미지는 인간 감정의 성숙과 미완성을 동시에 표현하며, 사과의 붉은 색은 성숙한 욕망과 후회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성숙한 열매로서의 완성됨과 금지된 열매로서의 욕망을 암시하며, 붉음이 퇴색하여 노랗게 변하는 과정은 사랑의 뜨거운 순간이 식어가며 남는 공허함과 후회를 상징합니다.
사과의 붉음이 벗겨진다는 것은 욕망으로 충만했던 순간이 현실적 계산과 거래로 변질되는 순간을 자각함으로써 현실적 자각과 그로 인해 피할 수 없는 후회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냅니다. 또한 “아랫배가 축 처진 봉지”라는 표현은 단순히 사과 봉지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남녀의 성숙한 나이와 감정 상태를 암시하는 장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삶의 무게와 감정적 피로감을 상징하여, 현실적 무게감과 낭만적 감정의 대비를 강조합니다.
「둥근 물집」에서 터지지 못한 물집은 감정이 억눌리고 해소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상태로, 이는 사랑에 상처받고 미처 극복하지 못한 감정의 잔재를 드러낸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눌린 채 머물러 있는 심리적 상태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사내와 화자의 관계는 현실 속에서는 단절되고 감정의 허무함으로 남아 있지만, 상상 속에서는 여전히 감정이 요동칩니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현실적 두려움과, 상상 속에서나마 자유롭게 그려보는 욕망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결국, 「둥근 물집」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상태를 암시하며, 현실의 무게와 감정적 피로가 겹쳐,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마음과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랑이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시 속 인물들의 감정적 고립과 현실적 한계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신 남녀의 현실적 고통과 감정적 공허함이 시적 상징을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난 점에서, 이 시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감정적 회피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5.03.29/kimseonbi/김승하 시인 와 물집의 상징성, 우정인 시인의 <둥근 물집>
골목 어귀 잊을만하면 문을 여는 과일가게가 있다 잊히기 전에 나타나는 젊은 사내 하나와 모둥이의 걸음 수를 재는 사과가 있다 사과는 욕심이 많은 아이처럼 불은 얼굴을 하고 있다 사내는 맛 좀 보라고 사과 한 조각을 잘라 내 입에 들이민다 나는 깜짝 놀라 속살 속에 스미는 쓸쓸한 음각을 혀 밑에 감추었다 아직 바람도 다 익지 않은 가을인데
햇살이 잘 밴 사내의 어깨에 기대는 상상을 한다 오래전에 놓친 이슬 냄새가 날지 모른다 풋잠이 들었을 때 그의 손이 닿으면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겠지 상상은 순식간에 과일가게에 퍼진다 상자들이 들썩인다 하룻밤 미쳐서 그의 싱싱한 심장을 베어 먹을 수 있을까 그의 여자로 과연 그러다가 사내에게 물었다 얼마예요?
주춤, 사내가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돌린다 여섯 개 만 원이요 붉음이 노랗게 벗겨져 후회로 바뀌는 순간은 아주 크고 둥근 것이라서 나는 하루에 한 알이면 일주일은 먹겠네, 재빨리 지갑을 열었다 사내가 검은 비닐봉지에 사과를 담는다 아랫배가 축 처진 봉지에 담긴 사과가 둥근 물집 같다 나도 터뜨리지 못한 물집 같은 저녁
2024,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둥근 물집/우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