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며

응원봉

한가위 방학 숙제인, 성묘와 차례를 무사히 마친 다음 날 아침, 서둘러 노트북을 챙겨 강변의 별다방으로 향한다. 첫 커피 한 모금이 가을의 서늘함을 각성시킨다. 유리창 너머로 오락가락 내리는 비바람에 강물이 출렁거리는 풍광을 보다가, 긴 강둑을 걷는다.

마주 오는 할아버지는 벌써 패딩을 입었고, 그 옆 활기찬 사내는 반팔에 반바지만 입고 씩씩하게 달리고 있다. 오늘의 서늘함을 할아버지는 쌀쌀함으로, 싸나이는 시원함으로 느끼겠지? 나에게는 이 가을의 서늘함이 시원함으로 다가왔다가, 어느덧 심술부리듯 싸늘함으로 변덕을 부린다.


흐릿한 하늘이 낮게 깔리고, 방금까지 내리던 비는 잠시 숨을 고른 듯 잦아든다. 젖은 보도 위엔 회색 구름의 그림자가 번지고, 작은 물웅덩이마다 바람의 흔적이 동그랗게 일렁인다. 강변의 나무들은 물기어린 잎을 흔들며, 저 멀리 회색빛 아파트 숲을 바라본다.

한강은 잿빛 하늘을 품은 채 느릿하게 흐르고, 물결 위엔 아직도 빗방울의 여운이 조용히 남아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지금, 도시의 소음도 숨을 죽인 듯 고요하다. 오직 강물만이 인내하듯 묵묵히 표류하며, 말을 건넨다. “모든 것은 스쳐 가지만, 이 순간은 을씨년스러운 기억으로 남으리라.”


날씨는 변죽 부리듯 변화무쌍하다. 비 갠 뒤, 강 건너 숲은 짙은 청록의 물결처럼 이어지고, 그 뒤로는 구름을 머금은 산이 침묵의 장단을 두드리듯 묵직하기만 하다. 강물은 말이 없고, 하늘은 낮게 드리워져 헤어짐의 순간을 길게 붙잡고 있다. 문득 이 쓸쓸한 풍광에 정지상의 ‘송인’이 겹쳐진다.


送人(송인)


雨歇長堤草色多(우헐장제초색다)

宋君南浦動悲歌(송군남포동비가)

大同江水何時盡(대동강수하시진)

別淚年年添綠波(별루년년첨록파)


연인을 보내며


비 개인 긴 강둑에 초록빛이 짙어지고

남포에서 연인을 보내니 슬픈 노래에 울적하네

대동강 물 어느 세월에 다 마를까

이별 눈물이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


나는 한강의 청명하고도 고요한 공기 속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내 곁을 스쳐 가는 가을이 아쉽기만 하다. 이 가을빛은 서서히 사라진 뒤에도 폐부에 투명한 시간의 흐름을 남긴다. 해마다 이별 눈물을 푸른 물결에 더했던 정지상의 애수를 상상하며, 무심히도 떠나가려는 가을을 노래한다.


送秋(송추)


雨過江邊水影斜(우과강변수영사)

雲低遠山朝煙遮(운저원산조연차)

漢江落葉隨波去(한강낙엽수파거)

萬感留心待別華(만감유심대별화)


가을을 보내며


비바람 스쳐 가는 강변 위로 물그림자 비껴 드리우고

낮은 구름 먼 산은 아침 안개에 뒤덮이네

한강 낙엽은 너울을 따라 무심히 흘러가고

만 가지 감회는 폐부에 스며 이별의 시간을 맞이하네



중추절은 가을을 초추, 중추, 종추, 가을의 시작, 한가운데, 끝자락으로 나눈 구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초추는 음력 7월로, 입추가 지나, 여름의 열기가 물러나고 첫 바람 속에서 가을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나뭇잎은 아직 푸르지만, 하늘이 높아지기 시작한다.


중추는 음력 8월로, 가을의 한가운데다. 하늘은 높고, 달은 둥글며, 수확이 무르익는 풍요의 절정기다. 그래서 중추절을 한가위라 하여, 가을 한가운데의 달빛을 즐기는 명절이 되었다.

종추는 음력 9월로, 서늘한 바람이 불고, 낙엽이 떨어진다. 만물이 겨울을 준비하는 시기다. 자연의 숨결이 길게, 조용히 가라앉는 가을의 끝이다. 북미에서는 이 시기 ‘인디언 써머’라 불리는 일주일, 따사로운 햇볕이 계속되며, 여름날이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입추가 지난 8월 31일에 가을의 시작을 기대하며, 토함산 자락에 올랐다가, 늦여름 무더위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직 여름의 숨결이 사그라들지 않은 8월의 끝자락, 토함산 등성이는 가을을 기대하기엔 너무 뜨거운 여름의 품이었다. 여름 장군은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듯 어마어마한 열기를 뿜어냈다.


여름 장군의 마지막 진군


가을을 불러보려

토함산 자락에

올랐건만


여름 장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네

자신을 잊지 말라 외치듯

숨결마다 불기운을 뿜어낸다


나는 뜨거운 숨결 속에서

가을의 그림자를

찾으려 하네


그러나 여름 장군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뜨거운 생의 존엄인 듯



그땐 9월을 지나, 10월 한가위에도 이렇게 무더우면 어쩌지 걱정했건만, 9월 중순에 소리 소문 없이 가을이 다가오더니, 계속되는 가을비로 이제는 가을이 떠나가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이러다가 진짜 10월 말에 늦가을을 건너뛰고 겨울이 훅 와버리면 어떡하지?


감정 붙잡기


10월의 시작

가을은 어느새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가고 있네


들녘의 빛은 아직 따뜻하지만

온기는 손가락 사이로

새 나가 버리네


나는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네

구름은 흘러가고

바람은 돌아오지 않네


모든 것이 잠시

머무는 듯 보이나

그 잠시가 곧

영원처럼 떠나가네


나는 오늘의 마음을 펼쳐

햇볕 아래 말리네

뜨거운 슬픔이 휘발되며

투명한 자리에 머무네


구름은 흘러가고

강물은 미끄러지지만

나는 그 위에

한 줄의 시를 쓰네


그리움이 떠난 자리

적막이 밀려올 때

그 적막 속에서

나는 감정의 숨소리를 듣네


아 이토록 빠른 세월 속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사랑했다는 흔적

그것이야말로

내가 붙잡은 감정의 숨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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