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역사의 변곡점을 알 수 있는가

일타강사

1453년에 조선과 서양에서는 공교롭게도 역사의 큰 줄기를 바꿀만한 사건이 발생한다. 1453년 오스만트루크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오스만트루크의 메메트 2세는 동로마 제국 군대가 맹렬히 저항하자 전함의 밑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야음을 틈타 육지로 끌어올렸다. 다음날 날이 밝자 전함의 초대형 대포를 동원하여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고 결국 토프카프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런데 이 장면을 어디서 본 듯하다. 1981년 절찬리에 방영되었던 ‘명작만화 보물섬’에서 호킨스와 그 동료들이 요새를 구축하고 완강하게 저항하자 실버 선장이 그 부하들을 독려하여 전함의 밑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몰래 육지로 끌어올렸고, 날이 밝자 대포로 요새를 공격해 호킨스와 그 동료들을 위기에 빠뜨리는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스티븐슨은 400여 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자신의 소설에 채용한 것이다.

1000년 이상 전통의 이어 오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유럽은 충격에 휩싸인다. 유럽인들은 그 당시까지 지중해를 통해 아라비아 반도와 인도를 잇는 중계무역으로 큰돈을 벌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동양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통해서 신대륙을 발견했고, 1498년 바스쿠 다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나가는 새로운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종래의 유럽인들은 지브롤터 해협에서 시작해 보스포러스 해협으로 끝나는 지중해가 바다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어 동방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되자, 유럽인들은 자신의 세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한 것이다. 드디어 대항해 시대가 시작된다. 이러한 대항해 시대에 들어서면서 동양과 서양의 운명이 뒤바뀐다.

북유럽의 대표적인 앙숙,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도 1453년 끝난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방을 지배했던 윌리엄 대공이 1066년 영국을 정복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밀접하게 엮인다. 그 당시에는 중세 시대여서, 영국 전역을 노르만인들이 장악하지는 못했고, 지배층만이 앵글로 잭슨인에서 노르만인으로 교체된 것이다.

그래서 지배층은 프랑스어를 구사했고, 피지배층은 영어를 사용했다. 그 흔적이 영어 곳곳에 남아 있다. 영어 단어 ‘deer’를 찾아보면, ‘사슴’이라고 나오지만, 윌리엄 대공의 영국 정복 전에는 ‘deer’는 ‘야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프랑스어가 영국 상류층에 침투하면서, 야수를 가리키는 ‘beast’가 들어왔다. 그 당시에 영국에서 가장 흔한 야수는 사슴이었다. 그래서 ‘deer’가 ‘사슴’을 가리키는 말로 전락했다.

또한, 영어로 돼지는 ‘pig’이지만, 돼지고기는 ‘pork’이고, 소는 ‘cow’이지만, 소고기는 ‘beef’이다. 왜 그럴까? 이 당시에 돼지나 소는 하층민이 키우지만,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상층민이 먹는다. 따라서 돼지나 소는 영어 그대로 사용했고, 돼지고기나 소고기는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이원적 사회 구조 속에서 1453년 백년전쟁이 끝나면서, 영국의 지배층이 노르만인에서 앵글로 잭슨인으로 환원된다. 그렇지만, 당시의 영국의 지배층은 계속해서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프랑스어는 귀족어라는 관념을 지우지 못한다.

이러한 관념을 일소한 스타는 이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뒤에서야 태어나 1600년 이후에 영국의 확고부동의 문학 대문호로 자리 잡는다. 나는 초딩 시절에 영국인들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선진국의 오만 정도로만 여겼다.

나중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나서야 셰익스피어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걸작으로 백년전쟁 이후에도 남아 있던 영국 상류층의 프랑스어 사대주의를 박멸시켰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영어로만 썼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신조어를 만들었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근대 영어의 근간을 만든 것이다. 그의 위대함은 말로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1453년 세조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쟁취하기 위해서 정난공신들을 이끌고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쿠테타를 일으킨다. 내가 조선 역사를 들여다보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시점이 조선의 절정이 세종대에 너무 빨리 왔다는 것과 그 절정이 계유정난으로 인하여 너무도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명분도 없는 왕권 강화를 위해서 세조는 자신의 측근들만을 활용한다. 이로 인하여 측근들이 분에 넘치는 권력을 갖게 되고, 그들이 훈구 세력이다. 자신의 후손들은 이러한 훈구 세력 때문에 엄청난 곤욕을 치른다. 김종직은 항우가 자신의 조카인 의제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을 한탄해 조의제문을 짓지만, 연산군은 조의제문은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를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관련자들을 제거한다.

그런데 가장 웃픈 점은 세조가 주공으로 불리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는 것이다. 주공은 세조와 가장 대비되는 인물이다. 주공은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무왕이 일찍 죽고, 무왕의 아들인 성왕이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자 성심껏 성왕을 도왔고 여러 차례의 반란을 친정하여 진압한다. 그리고 성왕이 성인이 되자 권력에서 스스로 물러난다. 그리하여 공자는 꿈에서라도 주공을 보고 싶어 한다.

이러한 세조도 자신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은 알았나 보다. 집권 후에 신하들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한명회, 신숙주와는 빈번하게 술을 마셨고, 하루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세조는 신숙주에게 팔씨름을 제안한다. 처음에는 세조가 이기지만, 두 번째 판에서는 신숙주가 젓 먹던 힘까지 써서 세조의 팔을 확 꺾어 버린다.

신숙주의 완승이다. 군대에서 가장 하면 안 되는 일이 사령관이 포함된 축구팀을 꺾는 것이다. 왜 그러면 안 될까? 사령관의 뒤끝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신 장군은 양아치들의 가랑이 사이도 지나갔는데, 그까짓 축구 한판 봐주는 것이 대수랴? 하지만 우리의 신숙주는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무려 184일 동안 군대에 기거했지만, 사령관팀을 꺾으면 안 된다는 군대의 제1번 교훈은 나의 뼛속 저 깊이 각인되어 있다.

술자리는 오묘하게 쫑난다. 세조가 썩소를 지으며, 신숙주를 째려본다. 한명회도 이를 불안하게 지켜본다. 순진한 신숙주는 아무런 걱정 없이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의 루틴대로 새벽에 책을 읽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든다. 의심이 많은 세조는 신숙주가 꽐라 돼서 자신을 꺾은 것인지, 말짱한 맨 정신에 자신을 꺾은 것인지 테스트해 보고 싶다. 신숙주가 맨 정신이라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읽을 것이고, 꽐라 됐다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해서, 자신의 심복을 보내, 새벽녘에 신숙주를 지켜보게 한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한명회는 세조의 뒤끝 작렬을 이미 파악하고 있다. 자신의 오른팔을 신숙주의 집으로 급파한다. 신숙주가 잠이 들자, 신숙주의 방에서 초를 모두 치워버린다. 신숙주는 새벽 일찍 일어났지만, 어디를 뒤져도 초는 보이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이부자리로 돌아간다.

세조의 심복은 새벽녘부터 계속해서 신숙주를 감시하다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신숙주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궁으로 돌아가서 신숙주의 상태를 보고한다. 신숙주의 하극상 사태는 무사히 넘어간다.

이렇듯, 신숙주는 평생 호의호식하며 잘 산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는 항상 반전이 있다. 신숙주 사후의 평가는 엄청나게 박하다. 콩나물과는 달리 잘 쉬는 녹두나물을 가리켜 ‘숙주나물’이라 부른다. 한국사를 조금만 알아도, ‘숙주나물’이 신숙주에게 유래됐고, 그것은 신숙주의 변절 때문이라고 말한다.

1453년 전 세계를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 사건의 파장을 알 수는 없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오스만트루크의 메메트 2세나 세조도 자신이 일으킨 사건 후폭풍의 규모를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세에 당시의 역사가 현재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평가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라고 외친 크로체의 통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 역사적인 사실은 꿰지 못한 구슬일 뿐이고, 그 역사적인 사실을 관통하도록 꿰는 역사의 해석이 보배일 것이다.




keyword
이전 07화가면과 민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