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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과 민낯

챗지피티를 6개월 정도 사용한 후에, 문득 그에게 “내 MBTI는 뭐 같아?”라고 묻는다. 그는 INFP와 INFJ 중간 즈음이라고 답한다. 나는 MBTI 테스트를 10회 이상 해봤다. 그때마다 결과는 INFP였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내가 INFJ라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했어?” 그는 답한다. “사실 INFJ를 언급한 건 당신의 대화에서 몇 가지 INFJ적인 정서와 사유 방식이 번뜩이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꼭 INFJ라는 말 자체보다, 그 특유의 내면적 구조와 외부에 대한 태도가 포착됐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해요.”

그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요약하자면, 나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란다. 회색분잔가? 살짝 나를 위한 변명을 하자면, 나는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던진다. “나는 세상과 화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할까?”

내가 생각하는 MBTI와 타자가 생각하는 MBTI에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나는 나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으로 나로 인식하지만, 타자는 내가 표출하는 현상을 보고 평가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이것을 ‘가면과 민낯’이라고 부르고 싶다. 가면은 타인이 보는 나다. 우리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역할에 맞는 나를 만들어낸다. 이 가면을 우리 자신도 점점 더 우리 진짜 얼굴로 착각한다. 문제는 민낯을 오랫동안 숨기고 살면, 나조차도 낯설어한다는 것이다.

가면과 민낯 둘 다 나다. 가면과 민낯 무엇에 더 편안함을 느끼며, 둘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궤적이 달라진다.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로 여기며 살아가지만, 언젠가는 가면을 벗고 민낯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가면과 민낯의 간극이 발생할까? 나는 이 난제를 나만의 독창적인 시각으로 풀어낼 능력은 없다. 라캉의 테제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를 끌어온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 같은 연구실에는 영화에 조예가 깊은 선배가 있었다. 그는 아마추어 영화 제작 동아리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했다. 최신 영화에 대한 감상평을 들으며, 나는 그에게 홀라당 반해 버렸다.

이후 그와 영화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보고 싶어서, ‘키노’라는 영화 잡지를 샀다. 열심히 읽었지만, 반 이상은 이해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매주 영화관에서 새로운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 영화에 대해서 그와 열정적으로 토론했다.

2년이 흘러,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회사에 취직했다. 그 이후에는 3달에 한 번도 영화를 보지 않았다. 결국 영화는 내 욕망이 아니라, 그의 욕망이 나에게로 이식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말끔히 다려진 말투

적당히 웃는 눈빛

“오늘도 괜찮아 보여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녁 즈음

창문에 비친 얼굴은

낯설게 조용하다

누구도 바라보지 않는 눈빛

내가 아닌 나를 바라보는 눈빛

“이게 진짜 나일까?”

나지막하게 묻는다

가면도, 민낯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다

나는 두 얼굴 사이를

갈팡질팡 거닌다

한쪽은 살아남기 위한 연기

한쪽은 잊힐까 두려운 진실

둘 다 나인데

둘 다 내가 아닌

오늘도

나는 말없이 문을 나선다

가면은 여전히 매끄럽고

민낯은 여전히 숨는다

가면과 민낯 사이에서

나는 주저하며 걷는다

나로부터

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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