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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려면 좋은 부모가 되어야 하는가

민낯

아버지는 나를 36세에 낳았고, 나는 아들을 38세에 낳았다. 아버지와 아들은 72년 차이의 띠 동갑이다. 묘하게 아버지와 아들은 닮은 구석이 많다. 일단 친가와 우리 가족을 포함해서 아버지와 아들만 혈액형이 ‘O’ 형이다.

신기한 점은 아들의 눈매는 아버지의 눈매를 빼다 박았다. 특히 아버지의 눈 위쪽 경계와 아래쪽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는 조그만 별개의 원형 자국이 있고, 아들도 아버지와 동일한 영역에 동일한 원형 자국이 있다. 그 원형 자국은 너무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는 존재 자체도 알기 힘들다. 내가 아들의 눈에 그 원형 자국이 존재하는 것을 아내에게 알렸고, 아버지에게도 동일하게 존재한다고 하니 적잖이 놀란다.


아버지는 주로 광주에 사셨고, 나는 대학에 입학한 이래 죽 서울에 살아서, 아들이 태어난 뒤로는 아버지 집에 연중 5일 이내로 머물렀고, 아버지는 아들이 11살이 되던 해에 유명을 달리했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아버지 평생 50일 정도만 같이 살았다.

그런데 가장 신기한 점은 아들의 세수하는 폼이 아버지와 너무도 똑같다는 것이다. 유전과는 동떨어져 있을 법한 세수 폼을 아버지에게서 배운 적도 없는데 똑같이 행한다는 것은 경이롭기만 하다.


초딩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같은 직업의 친구들 아버지보다 승진이 늦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문제지만, 그때는 아버지가 무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어서 고딩 2학년 이후로 아버지와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면서 살았다. 물론 서울로 대학을 간 것도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서였다. 19세부터 나 홀로 사는 서울 생활은 고독하고 힘들었고, 나는 조용필의 ‘꿈’을 들으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뜨거운 눈물을 먹는다/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괴롭고도 험한 이 길을 왔는데/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그 누구도 말을 않네”


내가 결혼하고 나서 은근히 아들을 기다렸던 부모님은 매년 아들 소식이 없자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자, 한달음에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서, 일주일을 꼬박 새웠다. 내 평생 그때 아들을 낳아서 유일하게 부모님께 효도를 한 것 같다.

나도 내심 아들을 기다리다가 나에게는 자식이 없는 게 아닐까 걱정하기도 하고, 그러는 동안 단골네에게 가보기도 했다. 38세에 드디어 아들을 만났다. 아내의 뱃속에 아들이 머물러 있을 때, 나는 아들과 아내, 그리고 나 3명의 멤버로 구성되는 가족생활을 상상했다. 그때는 내가 유능한 아버지가 될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이 내 앞에 나타나니 덜컥 겁이 났다. 심지어 아들이 태어나고 50일 동안은 아들의 목이 꺾일까 두려워서 아들을 제대로 안아 주지도 못했다. 아들이 목을 가눌 정도가 되자 겨우 조심스럽게 안기 시작했다.

아내는 임신 동안에 내가 날린 부도 수표를 어느 정도는 믿어 주었다. 그러다가 아들을 낳고 나서는 내가 완전 허당 아빠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아들이 걸을 즈음에 열심히 육아를 하니, 나를 쳐다보며, 이미 늦었다는 썩소를 지어 보였다.


아내가 제일 이상하게 생각하는 점은 내가 아들과 전혀 놀아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아들과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몰랐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버지와 놀았던 기억이 하나도 없었다. 아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동양화와 서양화를 가르치고, 오목 같은 게임을 가르쳤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봐주지 않고, 동양화, 서양화나 게임을 통해서 세상의 매서움을 일깨웠다. 아들은 3번 연속해서 지면, 울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나를 쳐다보며, ‘이기니 좋냐’라는 눈빛으로 경고했다.

고딩이 된 아들은 이제는 나와 데면데면하며, 나와는 결코 게임을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학교에서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만날 때는 나에게 카톡으로 SOS를 요청한다. 나는 가능하면, 아들의 카톡에는 최대한 빨리 답변을 해준다. 과연 아들은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자식에 관심을 갖는 것을 장려하지만, 부모와 자식 둘 다 행복을 얻기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흥미롭게도 어느 일방만이 즐거움을 얻는 관계로 교도관과 죄수를 들어서 설명한다. 그의 역작 ‘행복의 정복’에서는 “교도관은 죄수를 감시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을지 모른다.” 아버지를 교도관으로, 자식을 죄수로 비유하는 것을 보면, 버트런드 러셀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는 않았나 보다.

대학 신입생 때, 내가 다니는 대학은 부정 입학 문제로 매우 시끄러웠고, 학생회는 교수회를 향해 부정 입학에 대해서 엄청난 비판을 가했다. 그때 어느 교수님이 학생회를 바라보며 외쳤다. “대학교의 주인이 학생이면, 교도소의 주인이 죄수냐?”


버트런드 러셀은 자녀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하라고 권한다. 이 대목은 초딩 시절에 읽었던 ’해와 구름 이솝 우화‘가 떠오른다. 누구라도 여기 나오는 나그네처럼, 강압적인 구름에는 버티지만, 따사로운 햇살에는 자발적으로 외투를 벗을 것이다.

지금 시대는 이전에는 신들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것을 개인의 이성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엄청난 문명으로 인해서, 세계적이고 물질적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어쩌면 37살 어린 아들이 나보다, 더 세계적이고 물질적인 새로운 시대에 적합할지 모른다. 나는 거의 평생 아버지와 데면데면했다. 대화를 할 수 없게 된 지금, 아버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러셀의 조언대로 아들과 너그러운 태도를 유지하여, 인생의 친구로서 서로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길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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