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지 못하는 기쁨

일타강사

사마천의 ‘사기세가’를 읽어보면, 와신상담의 주인공인,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이 가장 흥미롭다. 부차는 자신의 아버지 합려의 복수를 맹세하며 침상 대신에 장작 위에 누워 잠든다. 매 끼니마다 신하 백비에게 “내가 아비의 원수를 잊거든 나를 죽여라!”라고 외친다. 그는 불편함과 고통 속에서 의지를 불태우며 기어코 월나라를 치고 구천을 굴복시킨다.

이후에, 구천은 패배자의 고통을 안으로 삭이며 쓸개를 핥는 삶을 선택한다. 구천의 굴욕은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결국 강철 같은 인내로 달궈진 칼이 되어 돌아온다. 복수의 맹세, 그 불길이 식지 않았기에, 구천은 부차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한 후, 오나라로 끌려가 3년간 인질 노릇을 처절하게 수행한다.

그러다가 부차가 병들자, 구천은 부차의 변을 살펴 병세를 알아보겠노라고 자처한다. 그리고 부차의 배설물을 맛보는 수치까지 감내한다. 이런 구천을 지켜보는 부차는 구천에 대한 경계심을 푼다. 처음 ‘사기세가’를 읽을 때는 구천이 비굴하고 비참하게 보였지만, 나중에는 구천이야말로 존엄을 잃고도 의지를 꺽지 않는 무서운 자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 구천에게는 두 명의 유능한 신하가 있다. 바로 문종과 범려다. 문종은 글로 다듬은 복수의 설계자로서, 20여 년간 치밀하게 복수의 밑그림을 그린다. 범려는 물처럼 흐르는 지혜로운 전략가로서 구천이 오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함께한 동행자다.

오나라가 멸망한 뒤에, 범려는 조용히 관직을 버리고 사라진다. 그러면서 친구 문종에게 “우리 대왕 구천은 슬픔은 나눌 수는 있어도,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며, 구천의 곁을 떠나라고 충고한다.

문종은 너무도 충직하여, 범려의 직언을 이해하지 못한다. 문종은 변함없이 충직하게 구천의 곁을 지킨다. 그렇지만 문종의 충직함은 때로는 구천의 자리를 위협하는 그림자처럼 느끼고, 구천은 문종을 점차 멀리하며 냉대한다. 그리고 끝내 구천은 문종에게 칼을 내리고, 문종은 그 칼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유명을 달리한다.


그렇다면, 원래 인간은 슬픔은 같이 나눌 수 있지만, 기쁨은 같이 나누지 못하는 것인가? 슬픔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체험이기에 공감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말없이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이 곧 내 안의 상처와 맞닿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쁨은 때로는 사적인 감정이다. 기쁨을 말하면, 듣는 이의 마음에 시기, 질투, 비교가 깃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질투 없는 마음, 계산 없는 우정, 서로를 위하는 영혼 위에 놓일 때만 기쁨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는 기쁨을 나누지 못한 서글픈 기억이 있다. 나는 1998년 7월부터 변리사 시험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4명이 모여서 같이 공부했다. 1999년 4월에 변리사 1차 시험에 응시했다. 4명 중에서 한 친구만 합격했다. 나는 도저히 그 친구의 기쁨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떨어질 때마다 반복되었다.


한국 사회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그늘진 내면을 가차 없이 비추는 거울이자, 우리 사회의 정서적 풍토를 압축하는 상징이다. 이것은 단순한 질투가 아니다. 산업화의 질주 속에서 맺힌, 함께 가난했으나 부유해진 자들과의 관계의 단절이자, 상대적 박탈감이 일상이 된 사회의 씁쓸한 자화상이다.

여기에서 사촌은 반드시 혈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나와 가까운 곳에서 자란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그가 땅을 사면, 그 땅은 내 것이 아닌 그의 것이고, 그의 성공은 내 실패처럼 느껴진다. 이것은 기쁨을 나누지 못하는 게 아니라, 기쁨이 상대의 슬픔이 되어버리는 구조적 아이러니다.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동안 집단 중심의 농경 사회였고, 산업화 이후에는 성취 중심의 입시, 경쟁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기쁨은 내 자리의 상실처럼 느껴지고, 남이 잘되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는 박탈감이 밀려온다. 즉, 사촌의 땅은 땅이 아니라 거울이다. 그 거울은 나의 결핍을 비춘다.

하지만, 이 속담은 경고다. 기쁨을 함께 하지 못하는 정서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바닥이지만, 그것을 속담으로 남기고 공유하는 사회는 이미 그것을 반성하고자 했던 증거이기도 하다. ‘배가 아프다’는 말 안에는 ‘나는 부끄럽다’는 고백도 담겨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비교 대상은 아마도, 재산, 배우자, 자식일 것이다. 이 중에서도 자식 자랑이 가장 괴롭다. 한국 사회에서는 자식은 단지 자식이 아니라, 부모 인생의 요약본으로 여긴다.

돈은 부족하면 더 벌면 되고, 집이 작으면 언젠간 옮기면 되지만, 자식은 내가 선택하지 않았으되, 평생 나의 분신처럼 간직해야 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자식에 대한 비교는 삶의 가장 깊은 곳에 칼을 들이대는 일처럼 아프기만 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자문한다. “왜 나는 친구들의 기쁨 앞에서 슬퍼지는가?” “어떻게 해야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을까?” 기쁨은 상대의 마음에도 꽃처럼 피어나길 바라는 소망이 깃든 행위이기에 그 기쁨이 진심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섬세한 온기와 그릇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면서 친구와 동일한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생각도 행동도 더 잘할 수 있는 법이다.”라고 친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혼자 있을 땐 생각이 내 안의 벽에 부딪히고 맴도는 경우가 많지만,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서,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 다른 시선이 교차되며 생각은 의외의 출구를 찾고, 새로운 문장이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혼자 행동할 때는 두려움이 커지지만, 누군가 곁에서 “괜찮아!”라고 격려해 주면, 그 말은 하나의 불씨가 되어 주저하던 발걸음을 밀어준다.

함께 걷는 두 사람은 서로를 비춰 더 멀리까지 빛나는 존재가 된다. 혼자선 생각만 머무르던 곳을, 둘 이선 마침내 행동의 자리까지 옮길 수 있고, 그 행동이 길을 만들며,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정체성을 완성해 간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라면 생각도, 행동도, 마음도 더 깊고 넓어질 수 있다.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 두 주인공 ‘앤디’와 ‘레드’ 사이의 우애가 빛난다. 앤디가 쇼생크 감옥을 탈출하고 나서, 레드는 앤디가 너무도 그립지만, “그의 날개는 너무 빛나서, 새장에 그를 가두는 건 죄악이다. 그의 빈자리가 공허하다. 나는 내 친구가 그리울 뿐이다.”라고 혼잣말하는 장면은 지금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레드는 진정으로 친구의 행운을 빌어준다.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용기 내 가석방 심사대 앞에 선다. 그리고 레드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후회를 담담하게 진술하여, 심사위원에게서 가석방을 끌어낸다.

레드는 앤디가 이야기한 ‘지와타네호’를 되뇌며, 머나먼 여정을 계획한다. 망각의 도시 지와타네호는 레드가 서 있는 곳에서는 요원하기만 하다. 하지만 레드는 앤디를 만날 생각에 흥분한다. 그 머나먼 여정을 지나 그와 재회한다.


내가 어릴 때는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다가 힘겨운 수험 생활을 하면서 이 말을 잊어버렸다. 오히려 이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대학자의 조언을 들으며, 친구는 슬플 때도 필요하고, 기쁠 때도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한번 더, “두 사람이 함께 가면 생각도 행동도 더 잘할 수 있는 법이다.”를 가슴에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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