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말

응원봉

고딩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전주일’로 불렸다. ‘전주일’이라는 별명은 전두환과 이주일의 오묘한 조합을 내포하고 있었다. 전주일 쌤은 국어를 담당했다. 그는 유머러스한 외모와는 달리, 소년의 문학 감성을 지녔다. 시와 소설을 사랑했던, 전주일 쌤은 구양수의 다독, 다작, 다상량을 강조했다.


그는 6월 기말고사에서 다상량을 주관식으로 출제했다. “구양수가 글을 잘 쓰기 위해서 강조했던, 삼다 중에서, 많이 읽고 많이 쓰더라도, 그 안에 깊은 사고와 비판적 성찰이 없다면 공허한 반복에 지나지 않아, 많이 생각하라고 강조했던 것은 무엇인지 한문으로 쓰시오.”

나는 국어 문제지를 받아 든 순간, 이 문제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독, 다작까지는 생각났지만, “맨 마지막이 뭐였지?”를 반복하며, 머리를 굴렸다. 시험시간이 끝나갈 때까지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답안지를 내기 직전에, ‘多覺’이라고 썼다.


문제는 전주일 쌤이 내 답안을 국어 시간에 공개했다는 것이다. 평소 친하게 지내고 있어서 그런지, 전주일 쌤은 내 국어 시험 답안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잔머리를 굴린 것에 대해서는 가상하다고 평했지만, 내 의도를 꿰뚫어 보고는, 국어 공부를 대충 한 것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비판했다. 나는 ‘覺’이 ‘생각’의 각이라고 착각했지만, 그는 내 착각에 쐐기를 박았다. ‘생각’은 순우리말이었다.


그 이후로, 구양수의 다독, 다작, 다상량은 내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됐다. 글을 쓸 때마다, 고민해 본다. 정말, 다독, 다작, 다상량을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다독 다음에 다작하고, 마지막이 다상량인가?

다독은 글쓰기의 토양을 가꾸는 일이다. 다독이 첫 번째인 이유는 글 쓰기는 결국 말을 빌려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 쓰려는 것은, 물이 마른 논에 모를 심으려는 것과 같다. 우리는 양질의 고전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문장의 감각, 사유의 구조, 표현의 절제 등을 내면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서는 곧 모방과 창조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나는 에세이 작가 중에서는 조지 오웰을 가장 좋아한다. 그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는 나의 독서 최애 목록의 상위 순번에 자리 잡고 있다. 그중에서도 ‘정말 정말 좋았어’를 반복적으로 읽었다. ‘정말 정말 좋았어’는 그의 학창 시절을 회고하며 쓴 것인데, 내용은 제목과 정반대다.

나도 조지 오웰처럼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재미있었던 추억은 세세하게 묘사할 수 있지만, 부정적인 추억은 그냥 꽝이었다 정도만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소개팅을 나갔는데, 파트너가 내 마음에 쏙 들면, 그녀를 사진 찍듯이 설명할 수 있었지만, 파트너가 맘에 안 들면, 나는 일관된 멘트를 날렸다. “살짝 별로야.” 조지 오웰의 가장 빛나는 점은 부정적인 면이건, 긍정적인 면이건, 구린 이야기건, 관계없이 옆에서 다큐멘터리를 찍듯이 묘사하는 것이다.


구양수의 말처럼, 많이 읽었다면, 그다음은 반드시 써보아야 한다. 내가 학창 시절의 이야기를 자신 있게 쓰게 된 것도, ‘정말 정말 좋았어’의 문장을 모방하며, 반복해서 쓰기 연습을 하면서다. 읽었던 문장이 내 것이 되려면, 직접 써보고, 고치고, 다시 써야 한다. 초고는 늘 거칠지만, 그 속에서 내 목소리가 담겨 있다.

글쓰기의 가장 높은 경지는 생각하고 성찰하는 힘이다. 다상량은 단순한 고민을 넘어, 타자와의 대화, 스스로와의 논쟁, 의미의 해체와 재구성을 뜻한다. 이 단계에서는 글은 더 이상 흉내가 아닌, 자기만의 철학과 시선을 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마담 보봐르’의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말했던 ‘일물일어설’과는 어떻게 연결될까? 그는 일물일어설에 대해서 “단 하나의 단어가 맞지 않으면, 전체 문장이 흐트러진다.”라고 말했다. 구양수은 과정 전체를 중시하는 수양법이었다면, 플로베르는 단어 하나에 집착한 정밀성을 강조했다.

내가 알고 있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다 꺼낸다. 가도가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의 두 번째 글자를 ‘퇴’로 고칠지를 고민했던 ‘퇴고’는, 구양순의 삼다 및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과는 어떻게 맥락이 닿을까?


구양수의 다상량은 ‘언어의 조탁’이라는 점에서, 퇴고 및 일물일어설과 겹친다. 다독은 재료의 축적을, 다작은 형태의 실험을, 다상량은 그 모든 글을 더 나은 하나로 만들기 위한 정제 과정이다. 그러므로 가도의 퇴고나,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은 바로 이 다상량의 절정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결국 일물일어설, 퇴고, 다상량이라는 이 세 가지 정밀한 언어의 미학과 사유의 태도는 모두 다독과 다작이라는 뿌리 깊은 준비 없이는 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다독은 언어의 숲을 거니는 일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휘의 결, 문장의 향기, 사유의 흐름이 몸과 마음에 스며들게 된다. 그리고 다작은 나만의 문장을 만드는 손의 기억이다. 직접 써보지 않고는, 내가 어떤 리듬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장이 나에게 맞는지조차 알 수 없다. 게다가 글을 써본 자만이 작가의 섬세한 의도나 문장 사이를 흐르는 호흡을 읽어 낼 수 있다.


절충주의자인 나는, 삼다, 퇴고 및 일물일어설을 통합한다. 먼저, 언어와 사유를 쌓는 다독을 준비한다. 2 단계로, 손과 입으로 표현해 보는 다작을 실험처럼 수행한다. 3 단계로, 다상량을 통해서 내 표현을 성찰한다. 다음으로, 감각과 이성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퇴고를 반복한다.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단 ‘하나의 말’에 도달한다.


하나의 말

말 하나 찾으려

오늘도 나는

어제 쓴 문장을 지운다


수천 개 말 중

말 하나가

나를 바라본다


나는 오늘도

말 하나를

기다린다


이 ‘하나의 말’을 찾아내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학창 시절에는 방학 숙제 중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이 일기였다. 나는 일기를 하나도 쓰지 않다가 개학 이삼일 전에 몰아치기로 해치우려 했다. 문제는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없어서, 한 달 전의 날씨를 알아내기가 엄청 힘들었다.

대학 때는 노느라 일기 쓸 시간이 없었다. 학부와 석사 과정을 합쳐 13학기를 다녔지만, 단 하루의 일기도 쓰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회사 적응하느라 쓰지 못했다. IMF 사태로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는, 변리사 시험 공부하는데 정신이 팔렸다. 결혼하고 변리사가 된 후에야, 일 년에 5번 정도 일기를 썼다. 기분이 엄청나게 꿀꿀할 때만 썼던 것 같다. 일기를 감정의 하수구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작년부터 부쩍 글을 자주 쓴다. 아들이 고딩이 되고 나서는, 아내와 자주 다투는 모습을 목격한다. 처음에는 중재하려고 애썼지만, 내가 아들을 염려하는 것보다, 아내가 아들을 염려하는 것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에는, 가급적 모른 척했다. 그렇더라도 내 눈앞에서 둘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견뎌내는 것은 무척 힘들었다. 아들과 아내가 집중적으로 논쟁하는 시간에는 슬며시 집을 나왔다.


처음에는 대학 동아리 친구들과 등산도 가고, 마실도 다녔다. 특히 주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저녁 늦게 들어가면, 아내는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대놓고 쿠사리를 주지는 않았지만, 눈에서는 "혼자 노니까 좋냐?"라는 메시지를 날리고 있었다. 그 순간,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는 착한 남편이 되기로 맘먹었다. "앞으로는 한 달에 한 번만 놀러 다닐게." 그 뒤로는 동네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읽다가, 독후감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6개월쯤 흘렀다. 내가 글을 쓰면서, 구양수의 다독, 다작, 다상량, 가도의 퇴고,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을 고민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글을 써보고 나서야, 메타포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고민을 세상과 공유하는 것이리라. 사람들은 각자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따라서, 타인의 글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 해석은 수학 문제의 답처럼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내 글이 한 가지로만 해석되기를 바라면서, 극단적인 단어를 빈번하게 선택했다. 그러나 다양한 문학책을 읽다 보니, 꼭 한 가지로만 해석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기는 고전들은, 독자 각자의 삶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 같았다.


나에게 메타포를 고민하게 만든 결정적인 책은 베네틱트의 ‘국화와 칼’이었다. ‘국화’와 ‘칼’ 두 단어를 제외하고, 알쏭달쏭한 일본을 명확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국화’와 ‘칼’ 지극히 모순적이지만, 이들의 조합은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메타포의 진정한 힘이다!


글을 쓰면서, 내 느낌이나 고민을 가능한 적확하게 묘사하려고 애쓰고 있다. 나는 97년 유학 공부할 때, 영어 동의어 사전을 처음 봤다. 그때는 왜 동의어 사전을 들여다보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 동의어 사전이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손이 닳도록 들여다봐야 할 것이었다. 요즘 들어 동의어 사전을 찾아보면서, 유사한 말들 사이에서,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를 알아내는 재미에 빠졌다.


물론, 내가 쓰는 글은 나랑 비슷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메타포의 본질을 고민하다 보면,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메타포는 ‘meta’와 ‘phor’의 조합이다. ‘meta’는 무언가를 초월하는 것이고, ‘phor’는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메타포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말을 통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핵심은 ‘공간과 시간을 초월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는 일이리라.

최근,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부쩍 더 고립되는 추세다. 코로나 이후에, 삶의 방식이 급격하게 변동돼서 그러는 걸까? 극단적인 언사가 난무하고, 자신들의 분노를 미증유의 방법으로 표출하고 있다. 나도 요즘 들어, 더 많이, 더 자주 고독을 느낀다. 나는 그 고독을 글로 써내려 가고 있다. 내 글을 통해서, 고립된 자아들이 자신만이 고독하지 않다는 것을 공감하며,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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