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가면을 배신할 때

일타강사

영어 단어 ‘betray’는 주로 ‘배신하다’로 통용된다. 그런데 2번 뜻이 재미있다. ‘은연중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다.’ ‘Collins 영영 사전’을 찾아보면, “If you betray your feelings or thoughts, you show them without intending to”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감정은 아마도 분노가 아닐까?


‘맥베스’를 찬찬히 읽어보면, 분노 때문에 자신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면이 나온다. 레이디 맥베스는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하는 데 주저하자, 맥베스에게 퍼붓는다.

“갓난애 사랑이 얼마나 애틋한지 알아요. 난 고것이 내 얼굴 보면서 웃더라도 이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확 뽑고 골을 깼을 거예요, 내가 만일 당신처럼 이 일로 맹세했더라면.”


남편 맥베스가 던컨 살해를 망설이자, 레이디 맥베스는 가장 섬뜩한 감정을 폭발하는 대목을 보여준다. 그녀는 모성의 가장 따스하고 성스러운 이미지인, 갓난아이를 품 안에 안고 젖을 물리는 장면을 뒤집어, 차갑고 끔찍한 폭력으로 변주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갓난아이가 잇몸을 보이며 내게 웃더라도, 내가 맹세했다면 젖을 떼어내고 그 머리를 산산이 부숴버렸을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모성마저도 맹세 앞에서는 무너져야 한다는 집착, 결단의 절대성을 보여준다.


맥베스는 그녀에게 “던컨 왕을 죽이는 것은 너무 끔찍하다.”라고 하소연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맥베스의 주저를 나약함으로 몰아간다. 레이디 맥베스는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곧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는 일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녀가 맥베스를 몰아붙이는 방식은 단순히 ‘던컨 왕을 죽여라’라고 강요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녀는 왕을 죽이는 일이 끔찍하다는 맥베스의 주저를 꺾기 위해,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상을 의도적으로 꺼내 놓는다. 즉, 그녀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모성조차도 깨뜨릴 수 있다는 잔혹한 비유를 통해, ‘그 정도의 결단도 못하면서 무슨 왕이 되겠느냐’라고 맥베스를 몰아붙인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에게 내뱉는 그 잔혹한 대사는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그녀의 사회적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이라 하겠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여성은 순종적이고 자애로운 아내, 따뜻한 어머니의 역할을 기대받았다. 특히, 모성은 성스러운 영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녀도 극초반에는 ‘남편의 성공을 위해 내조에 충실한 아내’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맥베스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가장 금기적인 영역을 파괴하는 상상을 이야기한다. 분노 속에서 드러나는 건 그녀의 숨겨진 본모습, 곧 냉혹한 결단의 화신이다. 그녀는 모성이라는 인간적 감정을 철저히 버리고, 사회가 규정한 여성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위해 질서를 전복하는 존재를 연출하고 있다.


우리도 레이디 맥베스처럼, 자신의 역할에 맞는 각자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러다가 각자의 가면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훅 다가오면, 자신도 모르게, 가면을 찢으며 자신의 민낯을 보일 것이다.


가면과 민낯


가면은 미소

아내의 다정한 손길

젖 물린 아이의 눈부신 잇몸


민낯의 칼끝

맹세를 위해서라면

그 웃음을 꺾어 버리네


가면은 사회가 원하는 그녀

민낯은 욕망이 원하는 그녀


분노는 칼날처럼

가면을 찢고

민낯은 피 묻은 왕관을 응시한다


맥베스: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최종철 옮김/민음사/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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