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정의와 어깨동무하고 다니는 가

일타강사

영화 ‘인디안 썸머’의 첫 장면에는 안경을 쓴 박신양이 갑자기 안경을 벗으며, 주점 밀실에 침입해 누군가와 격렬하게 싸운다. 경찰서로 끌려온 박신양은 자백한다. “짜식이 위증을 했어요.” 변호사인 박신양은 자신의 사건에 증인으로 나온 자가 위증을 했다는 이유로 그와 싸움을 벌일 만큼 정의감에 불타고 있다.

17세기 초에 세르반테스가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은 ‘돈키호테’가 바로 떠오른다. 스페인 왕립한림원이 출간한 스페인어 사전에서는 돈키호테를 “세르반테스가 만든 영웅으로서 자신의 이익보다는 이상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수호하기 위하여 사심 없이 위험에 직면하면서 행동하는 인간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박신양도 영화 내내 돈키호테처럼 행동한다. 비리 재벌을 만나서 상담하는 도중에, 자신의 비위 행위를 자랑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온다. 선배 변호사는 그런 박신양을 못마땅해하며, 한마디 던진다. “진실과 정의가 어깨동무하고 다닌다고 믿는 거 숭고한데, 어리석은 생각이야.”

이런 박신양과 대비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박신양이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사무장 장용이다. 박신양과 장용이 술잔을 기울이면서, 박신양이 투덜거린다. “같이 일하면서 어떻게 한 번도 취한 모습을 안 보여 주시나요.” 이에 장용이 답한다. “저는 적당히 살죠. 적당히 돈 벌고, 적당히 취하고, 적당히 살찌고, 누구랑은 틀리죠.”


1990년대 후반 즈음에 TV 예능 프로에서 유명 배우가 술 무용담을 늘어놓는다. 그는 30-30 클럽을 설명한다. 30-30 클럽은 야구에서는 한 해에 30개의 홈런과 30개의 도루를 동시에 달성한 것인데 반해, 술에서는 일명 알잔(스트레이트 잔)으로 양주 30잔과 양맥(양주+맥주) 폭탄주 30잔을 동시에 마시는 것이라고.

친구랑 같이 TV를 보다가, 바로 실험에 돌입한다. 예산 문제로 우리는 가장 싸구려 양주 캡틴큐 5병과 병맥주를 2박스 사서 하숙방으로 향한다. 돌아가면서, 먼저 알잔으로 양주를 마시고, 곧바로 양맥을 들이켠다. 5-5에 쓰러지고 난 후에 친구는 7-7에 쓰러진다. 콩나물 해장국에 쓰라린 속을 달래며, 친구가 힘없이 말한다. “30-30 클럽은 아무나 꺼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네!”


지금까지도 술을 마시면, 내일이 없을 듯이, “부어라 마셔라”를 외치면서 쭉쭉 들이킨다. 술 모임에서 가장 먼저 꽐라 된다. 그나마 술자리는 좋아하지만, 술 자체를 즐기지는 않아서 이제까지 술을 마실 수 있다.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혼술을 하지 않지만, 술을 즐기는 사람은 혼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정확한 통계를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술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위장병에 걸릴 위험이 높고,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알코올 중독에 빠질 위험이 높지 않을까?


한편, 돈키호테는 사심 없이 위험에 직면하면서 행동하는 인간인 반면에, 박신양은 자신의 의뢰인인 이미연이 구속될 위기에 처하자, 사무장 장용을 통해서 위조 여권을 구비해서 이미연을 밀항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차로 도주시킨다.

이미연의 도주를 눈치챈 수사관들이 박신양의 차를 추적하자, 이번에는 자신이 변호했던 폭주족을 동원하여 추적하는 수사관들을 따돌린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 맨 마지막 문장,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를 되뇐다.

누군가는 차가운 머리에 의존해서 계획적으로 행동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뜨거운 가슴으로 앞장서서 행동하기도 한다.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은 둘 다 사회에 중요하지만,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이 더 필요하다.


아킬레우스가 태업으로 전투에 참전하지 않아, 그리스 군대가 수세에 몰려 있을 때,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파트로클로스는 뜨거운 가슴으로 헥토르와의 일전을 피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는 뜨거운 가슴보다는 차가운 머리를 더 선호한다. 차가운 머리를 가진 자가 마지막에 과실을 챙길 수 있기 때문이리라.

트로이 전쟁 최고의 수훈은 헥토르와의 일전에서 승리한 아킬레우스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판을 뒤집는 희생을 기꺼이 실행한 언성 히어로우 파트로클로스에게 마음이 더 끌린다.


박신양의 돈키호테 같은 행동 양식은 선배 변호사나 판사의 눈에는 거슬려 핀잔을 듣지만, 뜨거운 가슴을 가진 박신양 같은 사람이 점점 더 각박해지는 세태에서 보여 주는 정의감이야말로 우리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보양제가 아닐까?

“진실과 정의가 어깨동무하고 다닌다고 믿는 거 숭고한데, 어리석은 생각이야.”라고 충고한 선배 변호사에게 묻고 싶다. 진실과 정의가 어깨동무하지 않으면, 진실이 정의의 등을 타고 있는지, 정의가 진실의 등을 타고 있는지.


진실이 정의의 등을 타고 있다면, 정의를 수단으로 해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 정의를 수단으로 여긴다면, 정의를 수단으로 부리는 집단의 가치만이 투영된 진실이 추구될 것이다.

반면에, 정의가 진실의 등을 타고 있다면, 진실을 수단으로 부리는 집단의 가치만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선택적으로 편집되어, 정의의 탈을 쓸 것이다. 갑자기 조지 오웰의 마지막 역작 ‘1984’가 떠오르며, 소름이 돋는다.


민주와 정의를 부르짖는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지금 회고하니, 그 시대는 민주적이지도 않았고, 정의롭지도 않았던 것 같다. 진실과 정의는 서로를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그것을 부리는 집단의 통치 이데올로기만을 추구할 위험이 도사린다. 진실과 정의가 어깨동무하고 다닌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지 않고 숭고한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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