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강사
오래된 미래의 저자 호지는 라다크에서 생활하면서, 사람들이 대립하는 것을 보지 못하자 라다크 주민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그는 답한다. “우리는 그저 함께 사는 것뿐이에요.”
호지는 라다크 사회에서 갈등을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로서 ‘자발적 중재자’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발적 중재자는 이웃 주민이거나 지나가던 행인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권위가 아니라 평화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다. 갈등이 터져 나오려 할 때, 그 순간을 포착해 나서는 제삼자의 한마디가 부드럽게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라다크 사람들에게 분쟁은 이겨야 할 싸움이 아니라 피해야 할 불행이다. 그들에게 더 중요한 점은 공동체의 화합과 관계의 지속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레 중재자의 말을 따르고, 감정의 매듭을 조용히 풀어내며, 마을의 질서를 새삼스럽지 않게 회복한다.
라다크의 자발적 중재자는 법전이나 법정이 아니라, 마치 바람처럼 스며드는 존재이다. 갈등이 불씨처럼 일어날 때, 누군가 다가와 조용히 물을 뿌려준다. 그 물은 강제력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오래된 기억에서 길어 올린 샘물이다.
자발적 중재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부딪힐 때
먼지 일던 골목길에
누군가 발걸음을 멈춘다
바람처럼 가볍게 다가와
분노의 불씨에 작은 한마디를 떨구네
해 저무는 들판에
양 떼가 모이듯
마을 사람들도
그 작은 한마디 아래 모여든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갈등이 생기면, 서로의 분노만 표출하다가, 누군가가 “법대로 하세요.”라고 외친다. 이는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자, 인간적 관계를 단절하고 제도적 권위에 맡기겠다는 선언이다. 우리에게는 중재자는 사라지고, 재판관만 남았다.
“법대로 하세요.”라는 말은 갈등을 멈추게 하기보다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장치가 되곤 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갈등의 본질은 사라지고, 결국 누가 더 오래 버틸 수 있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되어버린다. 남는 것은 감정의 피로와 절차의 무게뿐이다.
신뢰와 불신
낯선 이의 한마디에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지고
웃음이 다시 흐른다
신뢰는 마음의 길
도시의 골목엔
법전만이 벽처럼 서 있네
서로를 믿지 못한 채 더 멀어져 간다
불신은 마음의 장벽
2001년 도쿄 신오쿠보역 선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수현 학생이 떠오른다. 그는 일본 유학 중에 술에 취해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보고 주저하지 않고 선로로 뛰어들었지만,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다. 이수현은 오래 기억될 자발적 중재자의 표상이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는 공동체적 가치 속에서 존중받아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의 무모함으로 치부되기 쉽다. 라다크처럼 공동체가 즉각적으로 중재자를 품어주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타인을 위해 나섰다가 ‘왜 그랬냐’는 시선을 받는다
냉소의 대가
우린 오랫동안 배웠네
나서면 손해 본다고
정의는 끝내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고
눈앞의 불꽃에도
물 한 방울 던지지 않으며
멀찍이서 팔짱만 끼네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
잃어버린 용기
잃어버린 연대
잃어버린 우리 자신!
한국 사회에는 ‘오지랖이 넓다’는 속담이 있다. 오지랖 넓은 사람이 자발적 중재자가 될 수 있을까? 이 ‘오지랖이 넓다’는 속담은 흔히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이고 있지만, 원래의 맥락으로 보면 자발적 중재자의 모습과 닮아 있다.
라다크에서 중재자는 환영받고, 공동체의 평화를 지켜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오지랖이 넓은 게 공동체를 살리는 미덕이다. 반면에 한국 사회에서는 오지랖이 넓은 게 간섭으로 비치며 조롱의 대상이 돼버렸다.
본래 오지랖이란 내 일이 아니어도 발 벗고 나서는 태도를 가리킨다. 이 태도를 자발적 중재자의 정신과 연결하면, 오지랖은 간섭이 아니라 연대와 돌봄이 되어, 법 이전에 대화와 화해가 가능해지는 여백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래된 미래’에서 말하는 과거 속의 지혜를 끌어와 미래의 대안으로 삼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지랖을 간섭과 참견이라고 낙인찍으며, 우리의 기억에서 봉인했다. 그러나 기억 상실증에서 깨어나듯, 이제 우리는 그 봉인을 풀고 오지랖의 본래 힘을 다시 불러낸다면, 그것은 곧 자발적 중재자의 귀환일 것이다.
오지랖
남 일 같지 않아
발걸음 멈추고
바람결에 스며드는 한마디
간섭이 아니라
연민의 자취
참견이 아니라
평화의 숨결
낯선 이의 고통에도
내 마음 젖어드는
그 오래된 품이
미래를 지키네
오래된 미래:헬라나 노르베리 호지 지음/노재현 옮김/중앙일보플러스/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