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함산에 올랐어라

응원봉

오늘은 토함산으로 출정한다. 그전에도 경주를 간 적이 있지만, 그때는 불국사랑 석굴암 위주로 관람했다. 토함산을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토함산' 하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다. 살짝 투박한 인상을 지닌 과 절친은 평소에는 말수가 적었지만, 송창식의 '토함산'은 언제나 혼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불렀다. "한발 두 발 걸어서 올라라/맨발로 땀 흘려 올라라/그 몸뚱이 하나 발바닥 둘을/천년의 두께로 떠받쳐라", "산산이 가루져 공간에 흩어진/아침 그 빛을 기다려/하늘을 우러러 미소로 웃는/돌이 되거라"


토함산은 노래 가사처럼, 비장하고 서글픈 느낌을 준다. 신비롭고 처연함을 상상하며, 기행문을 쓰기 시작한다.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새벽에는 풀벌레가 울고 있지만, 더위는 아직 물러서지 않고 있다. 트래킹 모임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는 첫 여행이라 더 기대된다. 차로 떠나는 여행은 생경함이 없어서 그런지, 설렘이 약하다.

반면에,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긴장된다. 여행 가서, 의외의 상황을 만나면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결코 맞닥뜨리기 어려워서 그런가? 알람이 울리고 있다. 마지막 짐을 점검하며, 떠날 채비를 한다. 잠을 자지는 않지만, 거의 1박 2일 수준의 여정이다. 18시간 동안의 일탈에서 만날 해프닝을 기대하며, 집을 나선다.


6시 즈음에는 이미 동이 터있다. 주말 이 시각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대개 골프 치러 가거나, 등산하러 간다. 저 멀리서 빨간색 불빛을 내뿜으며, 택시 한 대가 나에게로 달려온다. 초록색 예약 택시만 타다가 그냥 빈 차 택시를 타니, 이것도 생경하다. 서울역에 도착하니, 25분의 여유가 있다. 역 안은 한갓진 거리와 다른 세상이다.


나는 카페를 찾아, 소금빵과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5분 만에 후딱 해치우고, 열차가 진입하는 플랫폼으로 향한다. 19년 전에는 2년 동안 대전으로 열차 통근을 했었다. 오늘 타고 가는 열차도 그때 탔던 것과 동일한 모델이다. 열차는 오늘도 묵묵히 경주를 향해 달리고 있다.

고딩 때 영화를 보면, 등장하는 기차는 대부분 남자 주인공이 군대 가기 위해서 타는 입영열차였다. 거기에는 항상 이별 키스 신이 따라다녔다. 나는 동네 방위여서, 입영열차는 타보지 못했다. 내가 타는 기차에는 군인 아저씨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도 입영열차를 탈까?


요즘 기차 여행객의 짐은 다들 단출하다. 짐이 없는 여행객은 가벼운 배낭 하나만 들고 나섰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짐을 꾸렸을까? TV 드라마를 보면, 방자 같은 하인이 괴나리봇짐 하나만을 등에 지고 과거 보러 떠나곤 했다. 그렇다면, 대략 한 달 동안 옷 한 벌로 버텼다는 건데?

열차는 광명을 지나 대전으로 달려가고 있다. 창문으로 칠흑 같은 어둠과 한적한 시골 풍광이 교대로 다가오고 있다. 케이티엑스 속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터널을 뚫었을까? 미국에는 전 세계에서 가장 긴 철로가 놓여있지만, 미국인들은 열차 여행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긴 철로를 통해서는 주로 화물을 나른다. 머지않아 철도의 길이도 중국에 추월될 것이다.


산 사이의 공기는 말 그대로 오리무중이다. 비가 오려나? 산 꼭대기에는 동양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산안개가 자욱하다. 오송역 인근에는 고층 마천루가 올라가고 있다. 마천루 위에는 어김없이 노란색 크레인이 길게 늘어져 있다. 문득 드는 생각이, 마천루를 완성하고 나면, 이 긴 크레인은 어떻게 내리지? 옆에 있는 크레인으로 내릴까? 그럼 맨 마지막 크레인은 뭘로 내려야 하지?


'마천루'를 처음 들으면, 악마가 사는 곳인가라고 생각하게 된다. 고딩 1학년 영어 교과서에 'sky scraper'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고, 그 단어를 마천루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뉴욕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칭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만든 단어가 아닐까 추측한다. 100층 빌딩은 하늘을 긁을 수 있다는 상상은 나름 창의적이었다.

갑천이 유유자적 흐르고, 그 주변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해 있는 것을 보니, 열차는 대전에 진입하고 있다. 나는 경부선 열차를 타면, 매번 대전에서 내렸다. 대전은 나에게 남방 한계선이었다. 열차가 김천으로 향하고 있다. 영남의 산세는 얼마나 생경할까?


일단 김천으로 향하는 여정에는 터널이 매우 길다. 산세의 규모에서 경북에 진입했음을 직감케 한다. 지리는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에도 예전에는 그 정도를 살짝 무시했었다. '지리의 힘'을 읽어보면, 지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다. '지리의 힘'의 원제는 'Prisoners of geography'이다. 팀 마셜의 메타포는 매우 큰 인사이트를 주고 있다.

다행히, 비구름은 걷히고, 따가운 햇볕이 고개를 쳐들고 서서히 등장하고 있다. 오늘도 불국사는 햇볕에 바래며 역사를 쓰고 있을까? 그 많은 터널을 지나 김천역에 들어선다. 플랫폼의 왼쪽에는 여느 중소 도심의 모습이, 그 오른쪽에는 호젓한 시골 풍광이 대조를 이룬다.


경북 풍경의 생경함은 터널의 빈도가 높다는 것이다. 경북민들은 산악이라는 감옥에 둘러싸여,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만들어 갔겠지? 칠곡의 낙동강 수변에는 올망졸망 텐트가 즐비해 있다. 여기 캠핑족들은 가을이 오기를 학수고대하며, 망중한을 만끽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길다는 낙동강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들도 오늘의 낙동강 물에는 두 번 다시 발을 담그지 못하겠지?


유난히 긴 터널을 지나니, 좌우로 높다란 아파트가 계속된다. 이제는 대구광역시에 들어선 듯하다. 경주역까지는 10분도 남지 않았다. 오늘의 경주 트래킹에서 나는 무엇을 만나서, 관계를 맺을지 궁금하다. 그것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 줄까?


경주역에 내린 우리는 일단 택시를 타고 불국사로 향한다. 초가을 날씨를 기대하고, 오늘의 트래킹을 기획했지만, 실전은 만만하지 않을 것 같다. 뭐든 계획대로 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불국사 정문에 이르니 "무료 관람"이라는 안내 글귀가 눈에 뜨인다. 이제는 사찰 관람은 다 무료인가 보다.

불국사 관람의 출발은 다보탑 아니겠는가? 다보탑은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를 맞이한다. 항상 변함없다. 예전 10년 전에 불국사를 방문했을 때는 다보탑의 짝꿍인 석가탑은 보존 처리 중이어서 그 자태를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다소곳이 다보탑의 왼쪽을 지키고 있다.


다보탑을 지나 대웅전으로 향하는데, 석조 계단 아래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원만한 곡선을 이루는 아치 통로가 눈에 띈다. 직선의 기둥 대신 곡선으로 하중을 분산시켜, 천년의 세월에도 견딜 수 있는 안정감을 전한다. 낮게 드리운 햇살이 아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극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이는 현세와 극락의 경계를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듯하다.

아치에 빠져 있다가 눈을 마당으로 돌리니, 한편에 당간지주가 덩그러니 서로를 마주 보며 서 있다. 지금은 깃대가 사라지고 두 지주만 남아, 고요한 옛 법회의 장엄함을 증언하고 있다. 두 지주의 표면은 천 년의 비바람에 씻기고, 이끼와 세월의 얼룩이 겹겹이 스며 있다.


세월의 침묵


두 기둥은

서로를 바라보며

빈 하늘을 붙잡는다


한때 펄럭이던 깃발의 숨결은 사라졌으나

돌은 여전히 땅을 딛고

시간의 무게를 견딘다


바람이 스쳐가는 순간

그 자리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문턱이 된다


오늘이 불국사 4번째 방문이지만, 오늘을 제외하고는 올 때마다 항상 관람객들로 가득 찼다. 무더위가 우리에게 여유로움을 선물하고 있다. 기획자 친구는 사찰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다. 국보가 안치되어 있는 극락전으로 나를 데려가지만, 내 눈에는 극락전의 부처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돼지 목에 진주일까? 불국사 어디를 가든지, 오늘만은 한가롭게 사진을 찍으며, 넉넉히 들여다볼 수 있다.


불국사를 나온 우리는 오늘의 목적인 토함산 등반을 시작한다. 과연 토함산 정상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토함산 입구 경사는 생각보다 급하지 않다. 출발할 때는 토함산 정상을 찍고, 그 너머로 종주할 수 있을 것 같다. 9:30 출발할 때부터 엄청난 여름 기운이 내 겨드랑이를 스친다. 살짝 걱정이다. 산을 오를수록, 석굴암까지라도 갈 수 있기를 빌면서 행군한다. 20분 걷다가 휴식을 취한다. 물을 열심히 들이켠다. 걷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휴식 시간은 갈수록 길어진다. 1시간쯤 지나니, 토함산 오르막이 지옥처럼 느껴진다. 내가 괜히 객기를 부리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의심이 점점 짙어진다.


그냥 내려가자고 할까 하다가, 혹시라도 얼음물이 있는지 기획자 친구에게 묻는다. 다행히 그 친구가 얼음물 한 통을 건넨다. 얼음물을 얼굴에 대고 마사지를 하니, 조금 살 것 같다. 얼음물 약발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거의 15분마다 휴식을 취한다. 눈앞에 석굴암 주차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부터는 평평한 산길이다. 산 허리를 따라 걸으니, 산들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극락을 걷는 것 같다. 석굴암 관람도 무료다.


석굴암은 암자 입구에서 계단을 올라야만 볼 수 있다. 아쉬운 점은 석굴암 사진 촬영이 금지된 것이다. 석굴암을 천천히 관조하며, 내 눈 깊숙이 그 이미지를 새겨 넣는다. 내가 이제까지 본 불상 중에서 석굴암이 가장 섬세하고 웅장하다. 석굴암보다 1,000년 후에 조각한 불상마저도 그보다 퇴보한 것 같다. 심지어 지금 이 시대에 제작한 것마저도, 그보다 열등하게 느껴진다.


석굴암 관람을 마치고, 기획자 친구는 암자 관계자에게 석굴암 3층 석탑을 문의한다. 나는 멍하니 입구에 서 있는데, 흥분한 마음에 헐래 벌떡 뛰어오며, 말한다. "드뎌 오늘 석굴암 3층 석탑을 보게 되네!" 황급히 그를 따라나선다. 샛길을 따라 관계자 이외에 출입 금지 통로를 걷는다.

석굴암의 암자 곁, 사람들의 발길이 잦지 않는 외진 자리에서 이 석탑은 조용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주변의 소나무랑 단풍나무가 바람 따라 속삭이는 사이, 석탑은 한 자리에 묵묵히 앉아 토함산의 능선을 저 멀리 굽어본다. 군더더기 없는 선과 단단한 돌의 결은, 자연과 인공이 함께 늙어온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 친구는 나에게 외친다. "오늘 답사의 목적은 이미 이뤘다. 나머지 일정은 네 결정에 따르겠다."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한다. "바로 내려가자!"


점심을 먹고 나니, 비가 세차게 흩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바로 경주 국립 박물관으로 향한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에밀레 종'에 눈길이 머문다. 이 거대한 청동 종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천년의 혼을 품은 예술이자 기도의 울림이다. 종소리가 구슬프게 들리지만, 녹음 소리다. 살짝 속은 느낌이다.


거대한 종이 천 년의 울림을 간직한 채 매달려 있다면, 에밀레종 곁에 서 있는 석불입상은 말없이 세월의 침묵을 담아내고 있다. 풍화로 닳아버린 얼굴은 오히려, 더 깊은 미소를 품고, 우두커니 서서 시간의 그림자를 품는다.

박물관의 마당을 따라 천천히 거닐다가 뒷마당에 이르니, 배롱나무 한 그루가 무더운 여름 공기를 배경 삼아 화사하게 만개해 있다. 그 자태는 한낮의 뜨거움을 잊게 하며, 오히려 불볕을 품고 더욱 빛난다. 박물관의 풍광은 시간의 유구함을 머금고 있다.


시간과 생명


돌은 침묵으로

천 년을 세우고


종은 울림으로

세월을 흔든다


그러나 뜨거운 여름

배롱꽃은 순간을 불태우며

영원을 새긴다


내가 토함산 종주를 포기하는 바람에, 우리는 예정에 없었던 답사를 시작한다. 경주 낭산 지구를 걷기 시작한다. '낭산' 한자를 읽어보니, 늑대 산이다. 시골 산이지만, 알려지지 않은 영험한 산이다. 예상 밖에 선덕여왕릉이 여기 있다. 신라 제27대 군주 선덕여왕, 그 이름은 찬란한 신라의 역사를 대표하는 왕이지만, 낭산 자락에 남아 있는 능의 모습은 소박하기만 하다.


우리는 걸어서 들판에 놓여 있는 미탄사지 3층 석탑으로 향한다. 그 주위에는 사찰의 흔적은 사라지고, 오직 탑만이 세월을 건너 남아 있다. 탑 주변은 황량한 듯한 벌판, 그리고 멀리 보이는 마을과 산자락이 어우러져 있다. 탑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듯, 홀로 묵묵히 들판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들판의 증언


황금 들판

바람은 끝없이 흐르고

사람의 흔적은 사라졌다


그러나 한 기둥의 돌탑은

천 년의 숨결을 모아

하늘을 향해 서 있다


사라진 절의 노래는 멎었지만

탑의 침묵은 여전히

들판의 심장처럼 뛰고 있네


시곗바늘은 5를 지나 6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답사를 마무리하며, 황리단으로 향한다. 저녁을 먹고는 별다방에서 사진을 정리한다. 이제는 완전히 어둠이 깔리고, 오늘의 답사를 무사히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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