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다가오지만 소설은 다가가야만 하는가

응원봉

“영원할 줄 알았던 사랑도 저물고/이젠 그 흔한 친구마저도 떠나가네요/나이가 들어서 나 어른이 되나 봐요/왜 이렇게 불안할까” 빅뱅의 ‘라스트댄스’가 내 귓가를 때린다. 평소 음악을 즐겨 듣지 않지만, ‘라스트댄스’는 내 마음에 훅 들어와 버린다.

바로 ‘라스트댄스’를 검색한다. 놀랍다. 20대의 지드래곤은 벌써 삶의 체념과 상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건가? 그는 청춘, 이상, 서로를 믿었던 마음, 심지어 자신에 대한 믿음까지도 저물어가고 있는 것을 노래하고 있다. 삶의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이나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 외로움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라스트댄스’를 반복해서 듣는다. 사랑과 우정, 청춘과 이상이 하나씩 저물고 남는 건 어른이 되는 일이라는 고독의 노래는 귀로 듣지만, 그 고독감이 내 가슴을 확 파고든다.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떨림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버린다.

“혼자가 되어서 나 외로워 보이나요/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한다. 나조차 나를 위로할 수 없는데, 누가 날 알아줄 수 있을까라고 외치며, 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삶의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있는 욘 폰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을 읽는다. 아침은 탄생의 메타포이고, 저녁은 죽음의 메타포다. ‘아침 그리고 저녁’은 단순히 하루를 다루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 사이의 경계를 탐색하는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소설이다.

욘 폰세는 존재의 떨림을 섬세하게 잡아낸 작가로서,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죽음과 삶 사이에 존재하는 애매한 시간의 세계를 창조한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공간에서 인간이 세상에 나타나고 사라지는 과장을 고요하게 성찰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아침 그리고 저녁’이라는 책을 펼쳐 읽어야만, 욘 폰세의 세상에 입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문장을 따라가야지만 소설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 시나 노래는 말없이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그냥 앉아 있으면, 내가 갈까 하며, 나에게 다가오지만, 소설은 집중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 숲이다.

시나 노래는 우리의 마음에 문득 들어오는 감정의 방문자지만, 소설은 우리가 스스로 신발을 신고 길을 나서서 이야기 결을 한발 한발 걸어야 하는 머나먼 여정이다.

나는 ‘아침 그리고 저녁’의 숲을 차분히 걸으며, “모든 것이 하나이며 서로 다르고, 하나이면서 정확히 바로, 그 자신이기도 하다, 저마다 다르면서 차이가 없고 모든 것이 고요하다”라는 문장에 도달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서로 닿을 수 없는 외로움을 품고 살아야 한다. 외형, 성격, 삶은 다르지만, 존재의 본질이 죽음, 고독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다. 이러한 점을 인식하면, 고요 속에서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라스트댄스’에서 다가오는 외로움의 감정과는 달리,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는 존재의 본질로서의 외로움을 뼈저리게 느낀다.

나는 ‘라스트댄스’와 ‘아침 그리고 저녁’에서 위로를 받는다. 외로움은 본질적으로 고립된 감정이다. 나 혼자만이 외로운 것 같고, 이 외로움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것 같지만, ‘라스트댄스’와 ‘아침 그리고 저녁’를 통해 나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다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죽음은 막연하면서도 자신과는 상관없는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만,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직면하고 나면, ‘아침 그리고 저녁’이 내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시나 소설은 타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통로여서, 시나 소설에 공명되어야만, 시나 소설을 통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위로는 타인의 내면을 통해 나를 넓히는 체험이다. 시나 소설은 읽었을 뿐인데 내 마음 깊은 곳에 어떤 문 하나가 열리며, 낯선 이의 고통이 낯익은 울림으로 바뀐다. 시나 소설은 내 마음의 경계를 넓히는 예술이다. 결국 나는 더 깊이 살아가게 되고, 더 많은 이들과 연결되어, 내 삶은 더욱 풍요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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