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지지 않은 격리된 기억의 섬 풍도를 걷다

응원봉

6월 첫 일요일 아침, 나무와 풍광을 좋아하는 동아리 친구들과, 서해 먼바다에서 태평양 바람을 품으며 홀로 오롯이 야생화를 키우고 있는 풍도를 걷는다. 이번 풍도 답사는 기획자 친구에게 내가 건의했다.

풍도는 1894년 6월 일본이 조선 해역에서 청나라 군함을 기습하면서 발발한 청일 전쟁의 역사적 장소이다. 이 풍도 해전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이자, 조선을 전쟁터로 삼은 두 제국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풍도 해전은 조선이 주체가 되지 못한 전쟁의 배경이라는 점에서, 마주하기 껄끄러운 현실로 여겨졌고, 공식적으로 기념화되지 않았다.


나에게 한일 병탄의 역사는 뇌리 깊숙이 너무 아프게 각인되어 있어서 그런지, 직면하지 못하고 묻어둔 채로 살아가고 있다. 박은식 선생이 ‘한국통사’에서 하신 말씀 “나라는 망했어도 역사는 살아 있다면, 그 역사를 잊는 것이야말로 두 번째 죽음이다.”를 되뇌며, 아픈 역사적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말하고 전승하는 것이야말로, 한일 병탄의 역사에 대한 진정한 극복이고 치유의 첫걸음임을 다짐한다.

풍도로 향하는 발걸음은 대부도의 방아머리항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9:30에 대부도를 출발하는 배에 오른다. 우리 배는 1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2층 배다. 1층에는 마루가 깔려 있어 주로 어르신들이 누워있다. 우리는 좌석이 마련된 2층에 자리를 잡는다.


나는 배낭을 내려놓고 배 옆으로 나간다. 배 옆으로 양털처럼 부드러운 물보라가 뽀송뽀송 무심히도 이어지고 있다. 한자가 생기기 시작한 3,500여 년 전에도 배가 만들어내는 물보라를 보고, 나처럼 느꼈겠지. 안타까운 점은 해무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서해 바다의 풍광이 초점 흐린 싸구려 사진처럼, 흐리멍덩하다는 것이다.

어느덧 11:15 정도에 풍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풍도 입구에는 그 흔한 관광 정보 센터도 없다. 그냥 여느 시골 어촌 마을일 뿐인 분위기가 고요하지만, 동시에 말해지지 않은 역사와 격리된 기억을 품고 있는 풍도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풍도는 정녕 역사적 아픔이 명명되지 못한 장소이며, 누군가의 증언조차 닿지 않은 침묵의 구역으로 남아야만 하는가?


멜랑콜리한 기분을 누르며 풍도의 둘레길을 따라 고스톱 방향인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왼편에서는 깊고 울창한 숲이, 오른편에는 넓고 고요한 바다가 나란히 이어지고 있다. 콘크리트 도로는 깎아지른 듯한 해안선을 따라 직선으로 쭉 뻗어 있고, 바람은 나무 향과 함께 바다의 짠 내를 오묘하게 버무려 내 코를 자극한다. 콘크리트 도로 가장자리에 전신주와 전깃줄이 이어지는 모습은, 바깥세상과의 가느다란 이어짐을 암시하지만, 그 존재조차 풍도의 고요 속에 묻혀버려 미미하기만 하다.


해안가에는 커다란 테트라포드가 줄지어 놓여 있어, 마치 풍도를 침묵으로 무장시키는 감정의 방어벽처럼 보인다. 여느 바닷가의 테트라포드는 4개의 원기둥이 합쳐져 아기자기하게 배열되어 있지만, 풍도의 해안가에는 4개의 다각 기둥으로 이루어진 테트라포드가 너무도 무섭게 경계를 서고 있다.

원기둥의 테트라포드는 올라서서 걸어도 불평 한마디 흘러나올 것 같지 않지만, 다각 기둥의 테트라포드는 올라서는 순간 바로 미끄러질 것 같은 두려움에 다가설 엄두를 내지 못한다. 5학년 중반이 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원래 쫄보여서 그런 걸까?


풍도 해안가

바다는 말이 없고

숲은 비밀을 품고 있네

길 위에선

아무도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테트라포드는 바다를 향해

말해지지 않은 기억을 막으며

무언의 경계선을 긋고 있네


풍도!

아픔이 잊힌 채

오늘도 말없이

파도를 맞고 있다


풍도 해안가를 말없이 계속 걷는다. 이곳은 그 흔한 카페나 식당도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마른 가시덤불 사이로 선명한 분홍의 꽃 한 송이가 처연한 슬픔을 머금고, 수줍게 피어 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기획자 친구가 외친다. “해당화다!”

어릴 적에 자주 불렀던 동요, “해당화가 곱게 핀 바닷가에서/나 혼자 걷노라면/수평선 멀리 갈매기 한두 쌍이 가물거리네/물결마저 잔잔한 바닷가에서”에 나오는 ‘해당화’를 오늘에서 비로소 처음 본다. 이 친구가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냥 처량한 이름 모를 들꽃으로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동요의 해당화는 낭만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평화롭게 노래하고 있지만, 풍도 해안가에 외로이 피어 있는 해당화는 말해지지 않은 역사의 경계 위에 홀로 자란 생존의 징표다. 이 해당화는 가시 속에서 부서질 듯 여리면서도 단단하게 피어 단지 살아 있음을 묵묵히 진술하고 있다.

외로운 해당화를 지나니, 회갈색 자갈로 빽빽이 덮인 해변 너머로, 노란 금계국들이 뜨거운 햇볕을 받아 환히 빛나고 있다. 뒤로는 희미한 수평선이 금계국 꽃들의 위를 감싸고 있을 때, 그 꽃들은 줄기를 뻗어, 바다를 향해 고개를 들고 바라보는 듯한 모습으로, 누군가 말을 걸어줄까 기다리며, 풍도는 잊히지 않았다고 조용히 외친다.


풍도는 야생화의 천국으로 불리고 있지만, 가시덤불 사이의 해당화는 고통 속의 생존으로 침묵시위를 하고 있고, 자갈밭 위의 노란 금국화들은 이름 없는 삶의 연대기로 고요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 야생화들은 단순한 자연경관이기를 거부하며, 풍도가 품고 있지만 말하지 못한 고통의 상징인 것이다.

계속 걸으니, 이번에는 거친 바위 위에 선 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한 마리의 검은 가마우지가 바위 꼭대기에 홀로 앉아, 먼 수평선을 향해 정지한 듯이 시선을 보낸다. 그 아래로는 수많은 흰 갈매기들이 바위 위에서 쉬거나 머물며, 침묵의 군진을 이룬다. 새들은 날고 있지 않지만, 오히려 그 정지된 자세가 역설적으로 더 깊은 생의 긴장을 전파한다.


그 긴장의 침묵 속에서, 한 친구가 툭 말을 던진다. “이제는 슬슬 라면을 끓여야 하지 않겠니?” 시계가 정오를 지나고 있다. 마지막 배편 시각까지 겨우 2시간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급히 라면 물을 올리며, 각자 준비한 간식을 꺼낸다. 삼겹살은 교대로 굽는다. 산처럼 쌓여 있던 고기랑 코펠 한가득 라면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입속으로 사라진다. 드립 커피까지 다 마시고 나니, 어느덧 시곗바늘이 1시를 지나친다.


서둘러 짐을 싸고 고스톱 방향으로 전진한다. 드디어 흙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에는 농기계와 울타리가 보이고, 그 울타리 안쪽에는 흑염소들이 머리를 내밀고,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다. 울타리를 지나치니, 바위와 돌멩이가 흩어진 황갈색 경사면을 따라 흑염소 무리가 천천히 흩어져 오르고 있다. 흑염소들은 자연의 흐름에 따르듯 무리를 지으면서도 각자의 속도로 느릿하게 걷는다. 푸른 풀잎 사이를 골라 가며 쉬고 있는 염소들은 살아 숨 쉬는 섬의 리듬을 여과 없이 섬의 리듬을 보여준다. 인공적인 시설물 없이, 거친 땅과 생명 사이의 순응이 인상적이다.


섬과 염소

염소들은 말을 하지 않고

돌과 풀 사이를 조용히 지나간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고

누구도 방향을 묻지 않지만


염소들은 섬이 숨 쉬는 길을 따라

그들만의 방식대로 걷고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한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 청일 전쟁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위령비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선착장으로 향한다. 되돌아가는 길에서는 자연생태 보전 구역 안내문을 따라 산 위로 쭉 뻗은 계단 길을 걷는다. 그 길은 가파르지만 너무도 조용하여, 시간의 심연을 거슬러 오르는 통로 같다.


정상에 오르니, 나무들 사이로 푸르고 둥근 바다가 슬며시 드러난다. 아래에는 방파제와 조용한 자갈밭 해변이 펼쳐지고, 푸른 파도는 말없이 일렁이며, 과거의 격랑을 감추고 있다. 낡아 너절해진 계단을 통과해야지만, 볼 수 있는 이 풍광은 아름답지만, 아름다움 자체가 오히려 더 쓸쓸하게 다가온다. 나뭇잎 사이로 내려다본 바다는 너무 푸르고, 조용해서 이곳이 전쟁의 첫 장면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한다. 망각 위에서 펼쳐진 이 풍경이 나에게는 ‘말해지지 않은 격리된 기억의 섬 풍도’를 각인시킨다.

저 멀리 우리를 대부도로 되돌려줄 배가 고동을 울리며 느릿하게 들어오고 있다. 풍도의 언덕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너무도 고요하고 아름다워 오히려 슬펐다. 그 물빛 아래 이름 없이 사라진 역사를 되뇌며, 미세한 바람에도 파르르 떨고 있는 사시나무 잎새에 말을 건넨다.


풍도야

풍도야!

네가 지키고 있는 그 고요

내가 잠시 들여다보고 간다

잊지 않을게

너는 계속 거기 있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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