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
영화 ‘인디안 썸머’에서는 박신양이 자신의 열정적인 변호로 무죄 판결을 받은 이미연과 시골길을 걷다가 언덕 위에서 낙조를 본다. 이미연이 속삭인다. “사람이 죽으면 천국으로 가기 전에 들르는 곳이 있대요. 거기서, 살았던 동안의 기억 하나를 선택하는 거예요.”
과연 나는 천국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으로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한다. 대학에 합격한 기쁨, 아내를 처음 만났던 순간의 설렘, 꿈에도 그렸던 피렌체의 풍광,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의 얼굴 모습, 힘들게 올랐던 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광활함,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밀려오는 충격파,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감상하면서 느꼈던 기괴함, 강신주의 강의를 들으며 알게 된 철학 주제 등 다양한 기억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가지만 결정하기는 어렵다.
나는 프롬의 조언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를 가슴에 새기며, 지금을 최고로 여긴다. 따라서 결국에는 최고의 기억으로 가장 마지막 기억을 선택하지 않을까?
인디안 썸머는 북아메리카에서 11월 중순 갑자기 여름처럼 더워지는 기상 현상을 말한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주민들에게 신이 마지막 추수 시기를 알려주는 선물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삶도 인디안 썸머처럼, 중년의 열정을 마지막으로 다 태운다면, 가슴 떨리는 젊을 때만큼 활기찰 수 있다.
젊은 시절에는 오늘 하루에 자신의 열정을 다 쏟으며 지내다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가정을 이루며, 루틴 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우리의 곁에서 속절없이 흘러간다. 그리고 절대로 피드백되지 않는다. 어느 날 문득, 후회가 밀려든다. 그러면 우리는 게임에서 리셋을 누르면 게임이 초기화되어 다시 시작되듯, 우리의 삶도 리셋될 수 있기를 바란다.
한때는 드라마 ‘개과천선’의 주인공 김영민과 같은 삶을 꿈꾸기도 했다. 김영민은 거대 로펌의 에이스 변호사로 부자들만을 변호하는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기억상실증을 겪은 후에는 개과천선된 정의로운 변호사로서의 새 삶을 살게 된다. 혹시나 기억상실증에 걸려 인생 2회 차를 살기를 원했지만, 현타가 오면서 반성한다.
오디세우스는 거지꼴의 노인으로 10년 만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아무도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하지만, 20년 전에 키웠던 개 ‘아르고스’만이 오디세우스임을 알아차린다. 유모 에우뤼클레이아는 오디세우스의 무릎 흉터를 만져보고, 오디세우스임을 알아내고, 아내 페넬로페는 자신과 오디세우스만이 아는 침상에 관한 질문에 오디세우스가 정확하게 답한 후에야 오디세우스임을 믿는다.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은 오디세우스와 관계를 맺은 타자의 기억 속에 편재되어 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을 리셋하려면, 우리를 둘러싸고 만나는 많은 타자들에 편재되어 있는 기억까지도 리셋해야만 한다.
후회와 반성이 켜켜이 쌓이면서, 인생 5학년에 도달하면, 자신의 삶을 관조하기 시작한다. 이즈음이 인생의 인디안 썸머이다. 우리 삶의 유한함을 깨닫는 순간 마지막 중년의 불꽃을 태워보고자 한다. 이러한 중년의 불꽃은 사랑으로 향할 수도 있다.
인디안 썸머에서도 이미연은 중년의 불꽃을 사랑으로 불태우고 싶어 했지만, 검찰이 찾아낸 새로운 증거로 좌절된다. 사형을 언도받은 이미연은 피고인 대기실에 앉는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박신양이 보인다. 박신양은 이미연의 사형 선고에 충격받아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미연은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깝게 박신양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다. 문이 서서히 닫히는 가운데 박신양이 고개를 든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쳐다볼 뿐이다. 그들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이미연은 울면서 미소를 짓는다. 이미연은 천국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으로 박신양의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까?
인디안 썸머는 박신양의 독백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겨울이 오기 전, 가을의 끝에 찾아오는 여름처럼 뜨거운 날,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오지만, 그 모두가 기억하지는 못하는 시간, 다만 겨울 앞에서 뜨거운 여름이 다시 찾아와 주길 바라는 사람만이 신이 선물한 인디안 썸머를 기억한다.”
가을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는 지금, 뜨거운 여름이 다시 찾아와 주길 바라면 신이 선물한 인디안 썸머를 기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디안 썸머 동안에 천국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을 새길 수 있을까?
지금을 최고로 여기며 산다면, 천국으로 가져갈 단 하나의 기억은 매일 경신될 것이다. 낙조의 볕은 일출의 볕보다 덜 붉지만, 낙조의 볕이 은근하게 붉기 때문에, 일출의 볕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신이 선물한 인디안 썸머도 여름처럼 너무 뜨겁게 중년의 열정을 불태우지 않으면, 열정의 기운이 약하지만, 그 은근함으로 열정의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가을의 끝자락 뜨거운 날을 기억하며, 천국으로 가져갈 기억을 촘촘하게 새기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