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이 가르쳐준 것들
우리 가족의 가장 크고 많은 추억상자는 등산이다
처음 6살,8살 꼬마녀석들일 때 한겨울에 계룡산 삼불봉에 올랐다
그때 둘째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 거긴 길이 아니야 OO아!!!!~~"
" 내가 선택한 길이야"
꿋꿋이 '선택, 선택'을 외치며 길을 만드는(?) 녀석을 보면서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벌써 깨달은 걸까 계룡산의 영험함을 몸소 체험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산이 좋아졌다
오르는 길의 지난한, 반복되는 과정의 시간들이 우리 관계에 여백과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주었다
특히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산에 오르는 어르신들의 무한 릴레이 칭찬을 받는 재미가 쏠쏠했고 덕분에 아들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렇게 우리가족의 산앓이가 시작되었고 우리나라의 많은 산을, 더 깊게 느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도전했다
바로 가족 백패킹!!
백패킹은 산 정상에 직접 텐트를 치고 잠을 잔다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고 칠흑같은 어둠속 별도 볼 수 있다! 날것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지내다 오는 여행, 우리에겐 너무 매혹적이고 취향저격 아이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첫백패킹은 어땠을까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더 창대했던 조령산 백패킹! 이 텐트 사진이 우리 여행의 우여곡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바람에 떠밀려 우연히 안착한 것 같은 저 텐트는 사실.. 저녁 8시반에 간신히 찾아낸 평지(?)였다... 새조, 고개령, 새가 넘는다는 뜻을 가진 조령산을 감히 인간이 넘본 것이 화근이었다... 날개 없이 손을 발 삼아 돌산을 기어오르는 의지와 투혼에도 조령산은 0.5평의 평지조차 내주지 않았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임을 산에서 길을 잃고 비를 맞으며 몸에 새긴 시간이었다.그리고 힘들 때 둘째가 "우리 다같이 파이팅 한번 할까?"라며 작은 손을 내밀었을 때, 첫째가 "아빠 괜찮아 아빠가 잘못은 했지만 책임지고 해결했잖아"라고 응원했을 때 우리는 고마웠고 감동했다... 어쨌든 우리 가족은 이번 여행 혹은 고행을 통해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알게 됐을 때 포기하고 되돌아 가는 것도 방법이다
둘, 산에서 길을 잃으면 계곡물을 찾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자연은 단순하지만 명확한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산을 오르며 우리 가족은 겸손을 배웠다 인간이 얼마나 작고 미약한 존재인지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연을 내 안으로 끌어들이고 포기하지 않는 내면의 단단함이 있음을 깨달았다
첫번째 백패킹은 실패였지만 그 이후 6년 째 우리는 백패킹을 이어가고 있다 봄날의 푸르름도 여름의 뜨거운 열기도 가을의 멋과 풍요도...
우리는 산이 내어준 자연의 자리에서 깊이 숨을 들이 마시며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귀와 뺨으로 느낀 바람, 리듬감이 독특했던 새소리, 본 적은 없지만 존재감이 있던 멧돼지
이런 자연의 소재들이 긴 시간 우리의 이야깃거리가 되어 조잘조잘 계곡물만큼이나 수다가 이어지고 또 이어졌다 추억은 그렇게 시나브로 쌓여간다
올 겨울은 처음으로 설산에 도전했다
덕유산은 국립공원이라 백패킹이 안되기 때문에 대피소에서 잘 수 있다
떠나기 전부터 비예보가 있어 무주여행 계획을 취소할까 고민했지만 기상청보다는 우리의 간절함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은 제대로 통해 안개와 눈으로 가득한, 땅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진 풍경에 압도되었다
겨우내 눈으로 다져진 얼음길을 아이젠을 끼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숨이 가빠지고 때마침 불어오는 강풍에 눈발이 매섭게 얼굴을 때린다
지금까지 산은 힘들긴 해도 땀을 식힐 그늘과 생기 가득 피톤치드와 눈을 즐겁게 할 꽃과 나무들이 있어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곳이었다
그런데 설산은 우리에게 냉혹함으로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그 차가움이 아이들은 맘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버거웠는지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설산은 한번이면 충분해!!"
그렇게 산도 인간도 서로 마음을 내주지 않을 듯 하더니 다음날 아침 설천봉으로 곤돌라를 타러 가는 길 위에서
"아이젠만 좋은 걸로 준비해서 또 설산 가자."
무심하게 내뱉는다
우리가 아들들과 산을 오르는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세상일이 내가 준비한대로, 계획한대로 되지 않을 때
더이상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만 같을 때
나를 압도하는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될 때
우리가 걸었던 그 많은 산길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산이 들려 주는 지혜의 말들이 마음 속 어딘가에 고이 저장돼 있을테니...
혹시 그래도 길을 찾지 못하거든 몸이 기억하는대로
배낭 챙겨 매고 등산화끈을 조이고 어디든 산을 오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