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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하는 능력이 필요한 이유

기꺼이 민폐를 끼치고 받을 수 있는 사회

by 시나브로 모모

요즘 시 대화 보고서 쓰기 수행평가를 진행중이다. 시 '보고서'가 아니라 "대화" 보고서라는 것이 포인트~~

이 활동은 3~4인이 한 모둠을 이루어 작품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나누면서 감상의 폭을 넓히는 작업이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사회자 역할을 하고, 사회자는 작품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녹음한 후 그 내용을 토대로 개인보고서를 쓴다. 언뜻 들으면 꽤 그럴싸한 멋진 프로젝트다! (현실은 이상과 차이가 있지만)


교사로서 나의 싸움은 이 교육적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적절한 판 깔아주기와 시범 보이기이다.


우리 교육현장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과정 역시 그 '과정의 결과'만을 평가하고 '과정 속에서 가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형평성과 변별력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면 교사는 중간에 도움이 필요한 친구들을 외면해야 하고, 제대로 말을 못하는 아이들은 민폐가 되어 눈총받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게 되면 말을 잘하는 아이도, 말을 잘하지 못하는 아이도 모두 불행해진다.


우선, 자칭 타칭 모둠의 에이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나름 공부를 잘하고 학급에서 인정받는 똘똘이들에게도 문제가 나타난다.

바로 오만함!!

그들은 '대화'를 하지 않는다. "강의"를 한다. 사회자를 맡았던 A군의 대화를 보자.


"이 작품은 산문적으로 씌었잖아. 그래서 한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줘. 연과 행을 나눌 때와 달리 호흡도 상대적으로 빨라지니까 운율에 영향을 주고 있어.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해?"

"응, 맞는 거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럼 다음 질문할게. 시어 유리의 집은 ~~~"


많은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 학생이 무슨 문제지? 아주 똑똑하구만!'

과연 그럴까?

대화는 상호작용적 말하기이다. 그리고 이것을 잘하려면 청자의 수준에 맞춰 단계별로 질문을 던지고, 청자의 말에서 꼬리를 잡아 상대방이 한발 더 나아갈 수 있게 자극을 주어야 한다. 어렵다!!!

그래서 사회자의 역할이 중요하고,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자 A군은 자신의 작품해석이 꽤 그럴듯하고 타당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대화'라는 의사소통 맥락을 조건으로 걸었다. A의 작품 분석은 뛰어났지만 모둠원들은 할말을 잃었고, 영혼없는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대화는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의 부딪힘 속에서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거나 상상하는 기회를 마련해 준다. 그것은 계획되어 있기보다는 '우연성'에 기댄다. 그래서 50분의 대화시간은 알맹이로만 채워지지 않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관련이 없어 보이는 내용들도 끼어드는 것이다. 그러다 '이거다'하는 보석같은 이야기를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는 이렇게 이상적이고 멋진 말로는 학생들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바로 직접적인 이해 관계를 언급한다. '대화'라는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에 좋은 점수를줄 수 없다고 했다.

A는 역시 똘똘이었다. 다시 태도를 바꾸어서 질문을 단계적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설명조로 돌아올 때가 있었지만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의식하기 시작했다.(점수를 부여하는 평가권이 교사의 마지막 남은 권위라면 이것을 교육적으로 야무지게 사용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우리나라 엘리트에게 필요한 태도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엘리트, 특히 시험을 통과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그 엘리트들이 저지르는 부정부패와 무능함을 마주하는 작금의 현실에서 나는 더 뼈저리게 생각한다. 혼자가 편하다는 마음, 나보다 못한 사람들까지 왜 내가 떠맡아야 하느냐는 억울한 마음, 그리고 평균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그 이하인 사람을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들이 그 누구보다 우리 사회의 "

"지도자"에게는 없어야 한다. 우리의 공동체는 단일함으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가치관, 여러 수준의 사람들이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무임승차하는 천덕꾸러기의 입장을 살펴보자.

동료교사가 푸념섞인 말을 건넨다. 기초학력 미도달이 나온 아이들이 어떻게 시를 이해하겠느냐고...

기초학력미도달 나온 학생은 내가 가르치는 반에도 있다. 심지어 3R(초6 수준의 읽기, 쓰기, 수이해)도 통과 못한 아이도 있다. 그러나 내 수업시간에 그들은 한번도 침묵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말하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것이 "시"여서 "시"라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답을 도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답을 서로가 공유할 수 있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사실,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시선이 어려웠을 것이다. 자신을 평가하고 무시하는 시선들이 그동안 학교생활을 하면서 꾸준히 누적돼 왔을테니까. 그러나 그 경험들이 곧 무임승차의 방어막이 될 수는 없음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걸 트라우마라 부르든, 상처받은 기억이라 부르든 똘똘이들이 대화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자신의 태도를 바꾸려 노력한 것처럼 무임승차 취급받는 아이들도 시도해 봐야 한다.

그것은 바로 "애쓰는 마음"이다. 노력해서 30점 맞는 것보다 노력하지 않고 20점 맞는 게 덜 쪽팔리다고 하는 그 마음이, 진정으로 부끄럽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못하면 모둠에 민폐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래서 모둠활동을 더 싫어하는 쪽은 똘똘이가 아닌 무임승차를 하는 아이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단 한번도 폐를 끼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교내 청소를 해주시는 청소여사님과 시설 관리를 해주는 주무관님에게 우리는 민폐를 끼치고 있다.

목숨걸고 산불을 끄는 소방관님과 뙤약볕에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빚을 지고 산다.

내가 낸 세금이라고, 난 도움달란 적 없다는 무례하고 뻔뻔한 학생들이 가끔 내 분노 버튼을 누르긴 하지만 그 아이들조차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가끔 어른들의 말에 어깃장놓고 싶어하는 때도 있으니 그들의 무례함에 대해 이야기해줄 뿐이다)

결국, 이 사회는 크고 작든 서로가 서로에게 민폐를 끼치며 살고 있다. 그러니 민폐를 없애려 예민함의 촉을 세울 것이 아니라 이 '민폐들'을 어떻게 서로 기꺼이 주고 받을 수 있을 지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국어교사로 내가 찾은 방법은 "소통"이다. 특히 대화하는 힘이다. A와 같은 똘똘이들이 입을 꾹 다문채 대화에 참여하지 못하는 무임승차하는 친구들을 원망할 때 이렇게 말해주었다.

"너희들은 기회를 얻었구나!!"

수준도 성향도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말을 시작하고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가를 연습할 기회!!!!

그것을 성장의 기회로 만드느냐, 불만과 억울함의 기억으로 남기느냐는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말해준다.


여전히 그 길은 멀고도 험난한다. 학생들 모두가 나의 교육철학에, 교수방법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과정을 버거워한다. 동료 교사 역시 마찬가지다. 되도록 하지 말자는 눈빛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소통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은 도구교과인 국어가 해야하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양성은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내가 보지 못한 것을 그가 보고, 그녀의 말에서 또다른 상상의 갈래를뻗는다. 그 다양성 속에서 수준의 잣대는 하나일 수 없고 평균이라는 것으로 퉁쳐지지 않는다.

이렇게 대화가 다채로워진다는 것은 서로가 귀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청의 힘은 크다. 상대의 말을 듣는다는 건 진심을 담아 응답하는 것이다. 좀 서툴고 엉뚱해도 진심을 다해 듣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도 침묵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애쓴다.

만약 그 애쓰는 모습을 민폐라고 한다면, 난 기꺼이 민폐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우리는 제각각 다른 관심사와 역량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기꺼이 민폐를 주고 받으면 어떨까? 그것이 만들어낼 위안과 여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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