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만든 환대
선생님~~쟤는 수업도 잘 안듣고 평소에 공부도 안하는 거 같은데 시험은 잘봐요..저는 더 열심히 하는데 성적이 안나오고....좀 억울해요ㅠㅠ
이렇게 하소연하는 학생들을
꽤 자주 본다...머리 좋은 아이들은 노력 안해도 잘한다는 시기심과 열등감이 묘하게 섞인 푸념 속에서 학창시절의 나를 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악바리"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한번 마음 먹은 건 끝까지 해내야 한다는 태도는 나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그 근성과 끈기 덕분에 남들보다 좋은 결과를 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고
내가 쓸 수 있는 노력의 총량은 정해져 있기에
이것저것 도전해 보고 실패의 경험을 갖는 건 나의 선택지에 없었다
무계획은 나에게 곧 불안을 의미했고 그 불안은 제거하고 막아내야할 것이었다
그래서일 것이다 내가 튜브없이 물에 들어가질 못하고 땅에서 발을 떼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지 못한 이유가....
지난 주말 남편과 성곽을 걸었다
말도 안되는 화창한 초여름 날씨, 이 눈부신 날이 아까워 어디든 가자 마음 먹는다 한강따라 워커힐까지 걸을까 종로 와룡공원 성곽길을 걸어볼까
예전에 공동육아를 할 때 7세 아이들은 달마다 스탬프 찍으며 성곽걷기를 했더랬다
그곳을 오늘은 둘이 걸어보기로 했다 아들들은 주말엔 다들 바쁘니까~~
성대후문이라길래 당연히 카페나 편의점이 있을 줄 알고 물 한통도 안 샀는데 아무것도 없.다!!!
산책 중인 어르신께 길을 물으며 가는 길에 가게가 있느냐 했더니 없단다~
우리는 어쩔 수 없지 마른침 삼키며
그렇게 성곽길 따라 진달래와 벚꽃잎이 떨어진 낭만적인 산책을 즐긴다
무엇보다 탁 트인 시야와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인상적이었다 저멀리 보이는 빌딩들과 달리 구불구불 길이 이어지고 지붕이 맞닿은 마을의 불규칙함이 만들어내는 풍경에 이끌려 좁은 계단 사잇길로 내려가본다
인생에도 샛길이나 개구멍이 재밌지 않은가.
가파른 경사를 따라 집들이 동그랗게 모여있는 북정마을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한다
옛날에는 동네 꼬맹이들이 이 구불구불한 골목길 사이사이를 뛰어다니고 숨바꼭질 하느라 해저무는 줄 몰랐으리라...어느 연인들은 으슥한 막다른 골목에서 입맞춤의 낭만을 즐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과 추억을 이야기하며 동네 구경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다육이를 참 예쁘게 키운 집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는데 문틈 사이로 음료 냉장고가 보인다 어라 가게인가?? 간판도 없고 판매한다는 쪽지 한장 없었지만 문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들이민다
"혹시 물한병 살 수 있을까요?"
맞다!!! 그곳은 예전 동네 초입에 있던 구멍가게였다 과자 몇가지와 음료와 주류 일부를 파는~~우리는 생수와 망고주스를 샀고 1900원이라 하셔서 2000원을 냈다 마침 주인 아주머니는 김치부침개를 부치고 계셨고
"김치부침개 냄새가 참 좋네요~"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부침개 한 장 먹고가요~~"하신다
괜찮다고 만류했지만 옆에 앉아 우리 부부를 보고 있던 할머니께서 맛있다며 먹고 가라신다.
우린 결국 자리에 앉아 부침개를 정말 맛나게 먹었다 "우리 마을은 인심이 좋아요~"
웃으시는 사장님의 말에 부침개를 호호 불어가며 한입 가득 그 정을 먹는다~~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렇게 바뀌었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샛길로 빠지기"를 기꺼이 수용하고 때로는 먼저 "선택"도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삶이란 게 참 재미있다
모든걸 계획하고 준비했다면 얻지 못했을 이 환대를 생각해 보라~~ 남편과 나는 그 부침개 한 장으로 마음도 든든하게 채운 채 성북동의 또다른 길을 찾아 나선다
간송미술관도 그렇게 흘러들어갔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마음먹고 가지는 않았던 곳,
부채에 그려진 그림과 글씨를 감상하면서 또 "멋"에 대해 생각한다 고상함이란 무엇인가 또 느낀다
사실 올해 나의 다짐 중 "먼데이라이팅"은 야심작이었다 매주 월요일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빠진 적 없이 악착같이 해 왔는데 지난주 한번은 쓰고 지우다를 반복하다 포기했다
매주 한편의 글을 완성해야 한다는 강박에 어느새 힘이 잔뜩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쥐어짜듯 쓰기 시작했다
그런 불안과 악바리의 나를,
나는 다시 샛길로 슬쩍 밀어본다
괜찮아 좀 쉬어 가자....
오랜만에 느긋하게 정처없이 걸었던 산책길에서 라일락의 진한 꽃내음과 새초롬하니 바라보던 길고양이와 김치부침개 한장 먹고 가라던 찐한 환대와 간송의 고아한 멋에 한껏 취해
이번주 월요일은 힘빼기가 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