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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무게는 '하지 않음'을 선택하게 한다

- 판 깔아주는 어른이 필요한 때

by 시나브로 모모

신규 2년 차, 나는 남학생만 13명인 단촐한(?) 학급의 담임이었다. 사실 여학생이 1명 있었는데 입학식날, 철원으로 전학을 갔다. 남고도 아닌데, 그렇게 우리 학급은 자기들끼리 의리로 똘똘 뭉쳐 끈끈한 정을 1년 동안 키워왔고, 나와도 꽤 괜찮은 케미를 자랑했다. 나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2학년 때에도 담임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년에 자퇴한 형님 한명이 추가되었다. 12명이 조화롭게 화기애애했던 명랑 학급은 복학생이 온 뒤로 어색함과 불편함의 기류가 묘하게 섞여 분위기가 참, 난감했다. 복학한 녀석은 형도 친구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쉽사리 섞여들지 못했고, 분노 조절이 되지 않아 험악한 말과 행동이 튀어나오기 일쑤였으며 선생님과 친구 모두에게 어려운 존재가 되어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어느날, '다같이 놀아보면 어떨까?'

나는 사고를 치기로 했다. 교장, 교감선생님께는 비밀로 하고 나의 멘토였던 엄마뻘의 부담임 선생님과 의기투합해 여름방학식날 1박 2일 단합대회를 떠났다. 포천에는 멋진 계곡들이 많았고, 마침 민박집 이름도 '추억'이었다. 처음으로 복학생에게 아이들이 장난치며 물을 뿌렸다. 다같이 몰려들어 형을 번쩍 들어 계곡에 밀어 넣으면서 깔깔 대며 웃는다. 우리 복학생 형님도 가만 있지 않는다. 180cm 넘는 큰 덩치를 자랑하는 복학생 형은 아이들을 향해 반격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다. 나 역시 절로 미소가 번진다. 그러다 아차!!

어느새 뒤에서 아이들이 두손과 두발을 잡아 들어올린다. "야!! 내 카메라!!" 아이들은 젠틀하게도 내 카메라는 안전하게 지켜주고 내 몸은 물속에 처박는다. 흠뻑 젖은 물귀신이 된 내 몰골에 아이들은 또 까르르 신이 난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가 이제 막 피어오르던 그 찰나의 순간을, 자신의 화를 못이겨 욕설을 날렸어도 다시 찾아와 죄송하다고,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전화를 걸었던 그 녀석의 고백을.

학생들과 나는 그렇게 많은 것을 함께 시도했고, 그래서 갈등했으며, 그 과정에서 함께 성장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과연 교사로서 학생들과 그런 도전을 기꺼이 함께 할 수 있을까?

2025년 현재, 학급의 아이들을 데리고 단합을 목적으로 여행을 가자고 제안할 수 있을까?


작년 10월 즈음이었던가. 주변의 초등학교에서 수련회를 간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오니 우리 아들도 친구들과 함께 추억을 만들 절호의 기회라며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의 학교에서는 1일형 체험학습도, 숙박형 체험학습도 모두 하지 않았다. 아이는 크게 실망했고,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원망했다.

왜 학교는 숙박형 체험학습을 교육과정에 넣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우리 때처럼 운동장도 개방하지 않네. 왜 학교는 방과후에 아이들에게 운동장을 개방하지 않을까?

왜 학교는 '하지 않음'을 선택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가?


최근 학교 현장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사건은 학부모는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불안을 남겼다. 교사가 있는 학교는 가장 안전하고,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곳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그곳에서의 범죄나 죽음은 그 자체로 엄청난 공포와 불안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접하는 여러 사건이나 사고들 중에서는 예방 가능한 것도 있고,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도 있으며 예상 불가능한 개인적 일탈에 의한 것도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교육활동' 중에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책임"을 논하고 '죄'를 묻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며칠 전 체험학습을 인솔한 담임교사가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은 혐의로 업무상 과실치사가 인정되어 형사처벌 받게 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주의 의무'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본다. 부모와 길을 가던 중 아이가 갑자기 뛰어가다가 사고를 당하면 부모에게 주의 의무를 가지고 형사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어떤 부모도 아이가 다치길 원하거나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들도 부모와 마찬가지이다.


'사고'는 예고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그 누구도 모든 위험과 사고를 막을 수는 없으며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그리고 사고가 발생했을 때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사는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질 것이 아니라 '노력'과 '대처'가 적절했는가를 기준으로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교사에게 너무나 가혹한, 과한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교사에게 내린 "형사처벌"은 단순히 법적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교사직을 박탈 당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교사들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은 바로 '나 때문에' 혹은 '내가 막지 못해서' 죽음에 이르렀다는 그 자책과 죄의식을 평생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것이 결국 학생들과 학부모의 많은 교육적 활동의 기회를 박탈할 것이라는 점이다. 나는 현장에서 느끼고 있다, 한없이 쪼그라드는 교사들의 마음을.

'안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하지 말자'고 이야기하게 되는 자기방어의 마음을 본다. 그속에는 나도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애초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할일도 줄어든다. 힘들게 일하고 비난받기를 선택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학교 현장에서는 특히 안전과 관련해 발생할 행사나 활동들을 최소한으로 줄여 나간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즐거워서 흥분하기 쉬운 활동일수록,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공간일수록 '하지 않음'을 선택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교사에게는 본래 '가르칠 권리'가 먼저 있었다. '가르칠 의무'라고 불러도 좋다. 교사가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을 가르치는 주체로서, 전문가로서 먼저 인정받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교사가 수련회가, 체육대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교육적 의미와 가치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교사들조차 그 의미를 묻지 않는다.

교사의 정체성은 '가르치는 일'이 아닌 보호와 돌봄, 때론 감시가 더해지기도 한다.


나는 두렵다. 아이들이 영원히 '아이'로 남아 '하지 않을 권리'를 이야기하게 될까봐.

아이들도, 교사들도 책임지지 않기 위해-혹은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음'을 선택한다면 대체 교육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로인해 상처받고 책임을 지기도 해야하는 경험들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가정'이라는 베이스캠프에서 마음껏 해 보았으면 한다. 몸도 마음도 다쳐 보고,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지 방법도 찾아보면서 그렇게 면역력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한다.

더 치열하게 갈등하고, 사과하고, 저항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갔으면 한다.


좋은 교사와 좋은 부모는 아이들이 그런 경험들을 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는 어른이다.

판을 치워주는 사람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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