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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바로 알기-4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다른 시각

by 김남기 Mar 25. 2025

(이 글은 스탈린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아야 된다는 목적하에 연재하게 된 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공부한 것을 최대한 어렵지 않게 짧게 정리하며 시리즈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YTN에서 설명한 고려인 강제 이주: 역시 여기서도 스탈린은 그냥 무조건 나쁜놈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있어 스탈린을 강하게 비판하는 소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 글쓴이가 생각하기에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한국전쟁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가해주었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1930년대 소련에서 진행된 고려인 강제 이주에 관한 것이다. 고려인 강제 이주는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판할 때 사용하는 중요한 사례다. 이것은 한국의 주류 학계(특히 한국사 분야 쪽 인사들)나 소위 재야사학계(재야에는 주류학계가 아닌 사람도 있지만, 여기에는 소위 ‘환빠’들도 포함함)나 할 것 없이, 고려인 강제 이주가 스탈린이 우리 민족에게 저지른 엄청난 대역죄라고 주장한다. 우선 글쓴이 또한 고려인 강제 이주가 민족사적 시각에서 비극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도 생각한다.     

고려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그러나 여기서 한번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정말 고려인 강제 이주가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인종적인 이유에서 한 정책인가?”, “고려인만 강제 이주를 당했는가?”, “고려인들이 소련을 증오했는가?” 등이 바로 그것이다. 러시아 연해주로의 고려인 이주는 1860년대부터 시작되었고, 1914년에는 러시아 내 거주 한인이 6만 명을 넘겼으며, 1923년에는 10만 명을 넘겼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 공산당은 고려인들에게 민족 자치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에 따라 고려인들을 위한 고려인 학교가 설립됐다. 즉, 소련 당국은 1920년대에 그 어떤한 나라들 보다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화들을 더 강력히 보호해주었다. 그래서 조선어 신문과 조선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소련 내 고려인 사회에서 만들어 질 수 있었다. 이렇게만 보자면, 레닌과 스탈린 시절 소련 공산당은 조선인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인 정책 및 보호정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940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삼국동맹 체결 조약 축하행사.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그 당시 소련은 극동 지역과 서부 지대에서 지극히 안보의 위혐을 받고 있었다. 1931년 만주 사변이 발생하여 일본이 만주를 점령했고, 1933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하여 나치 독일이 소련을 위협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방했다. 이 두 나라가 1940년 군사동맹을 맺기 전, 이미 반코민테른 협정에 사인했다는 것은 두 나라가 공통된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1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던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김동한이나 박석윤과 같은 친일파들을 앞세워 민생단을 만들어 조선인들을 만주에 정착 및 일본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그와 동시에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독립군들을 소탕 및 뿌리 뽑으려는 노력도 같이했다. 실제로 전설의 의열단 단원으로 알려진 오성륜이 1941년 동북항일연군 활동 중 일본군에게 항복하여 친일로 변절한 것은 일제의 항일무장투쟁 탄압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주는 근거일 것이다.     

고려인 강제 이주에 대한 보편적인 설명: 해당 이미지는 조선일보 기사에서 가지고 왔다.

결과적으로 1930년대는 극동과 서부에서 파시즘이 발현되던 시기였고, 소련에게 있어서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는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1937년이 되어 고려인 숫자는 17만 명을 넘어섰다. 앞서 언급한 고려인 학교가 370곳이나 연해주에 있었고, 이들이 발행하는 신문도 7개나 있었으며 실제로 소련은 강제 이주 전까지 고려인들의 자치 공화국인 고려인 소비에트 공화국까지 구상하여 설치 직전까지 갔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소련에 대한 도발을 1930년대 내내 멈추지 않았으며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 시 고려인들이 과연 어떤 편을 설지 의심했다. 즉, 그 과정에서 강제이주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STB 상생방송에서 설명하는 고려인 강제 이주: 환단고기를 추종하는 해당 환빠방송이나,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나 학계나 고려인 강제 이주의 다른 측면을 보지않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결국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정책에 따라 강제 이주를 하게 됐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하게 됐다. 고려인들의 정착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추정치를 16,000명에서 5만 명까지 추산하기도 한다. 만약 이 수치가 사실이라면, 많은 사람이 희생된 비극의 서사다. 사실 한국 사회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죽은 비극에 대해 많은 신경을 쓰고 있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부분에 대해 스탈린을 강력히 비판하는 소재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인들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무작정 탄압하고, 강제 이주하여 학살한 존재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오시프 스탈린과 소련이 고려인들을 무작정 증오하고 인종적으로 혐오하여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1938년에 발행된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
1969년 소련에 있던 고려인 집단농장: 고려인들은 초기 정착에서의 비극적인 사연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중앙아시아에서 집단농장을 잘 가꾸었다. 해당 사진은 논밭으로 보인다.
현재도 있는 고려인 농장의 모습.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강제 이주 당한 고려인들은 1938년 카자흐스탄에서 한글로된 전국신문인 ‘레닌기치’를 발행했다. 심지어 고려인들은 이 시기 고려어 방송과 고려인들을 위한 극장까지 운영했다. 소련 정부가 비록 우리말 교육을 이 시기에 금지했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또 다시 또 민족 가치를 보호하는 입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당시 고려인들만 소련에서 강제이주 당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인과 비슷한 이유로 폴란드인, 체첸인, 독일인, 라트비아인 등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 그 당시 독일의 경우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경우 반소극우 정권이었다. 라트비아도 비슷했다. 라트비아의 경우 1941년 독소전쟁 이후 나치에 협력하여 반공주의를 표방했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나라였다. 그리고 실제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은 친일파들이 많아지던 시점이었고, 일제는 만주국에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조선인들의 정착을 유도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자면, 일제의 만주 및 중국 대륙으로의 팽창은 고려인 강제 이주의 맥락이었다. 정리하자면, 1941년 진주만 기습 이후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에 대한 아무런 의심과 처벌없이, 그저 일본인만 사막으로 강제이주했던 미국의 행정명령 제9066호하고는 맥락적으로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지난 2014년 한국의 연합뉴스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사는 고려인 김 블라디미르(한국명 김용택씨)를 인터뷰했다. 김씨의 경우 한국에서 만든 고려인 관련 다큐멘터리나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흥미롭게도 그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강제이주 과하게 덧칠됐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연한 얘기지만, 해당 인터뷰 대상자인 김 블라디미르씨는 고려인 강제 이주자의 후손이다. 그는 1946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났고, 그 당시 소련군 장교였던 큰형님을 따라 북한으로 이주하여 함경북도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8월 종파사건 이후 다시 소련으로 돌아온 사람이다. 또한, 젊은 시절 앞서 언급한 고려인 사회 대표 언론인 ‘레닌기치’의 기자로 활동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소련 시절 스탈린 관련 포스터.

김씨는 인터뷰에서 “1937년 강제이주를 전후해 고려인 사회의 지식층에서는 당국의 강제이주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대다수 고려인들은 이주를 수용하는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즉, 김씨에 따르면,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뒤 대다수의 농사짓는 고려인들은 러시아 땅에서 그나마 굶주리지 않고 먹고 살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성향이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김씨는 “솔직히 고려인들이 고생했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살았던 사람에 비하면 여기 사람들(고려인)은 그런 아픔을 안 겪었다”라며, “일제의 식민통치에 이어 이념갈등, 그리고 6·25 전쟁, 전후 수십년간의 빈곤 등 그 비참했던 한반도의 삶을 고려인들은 모르고 지냈다.”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강제이주가 부당하고 억울한 부분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해당 인터뷰에서 김씨는 확실하게 “소련이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힘이 약해지던 1980년대 말과 소련 몰락이후인 1990년대 초에 일부 작가나 화가, 기자들이 자신들의 작품이나 글에서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려고 역사적 사실을 실제보다 부풀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소위 앞서 언급한 “고려인 수만 명이 병으로 죽거나 피살되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다. 즉, “한국에서 공산당 싫어하니까 소련 공산당의 악행을 비난하기 위해 그런 작가들의 말과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부각시킨 것도 고려인들의 비극적인 삶이 부풀려지게 된 한 원인일 것”이라고 확실하게 주장했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소련의 열차 기술력은 결코 뒤처지지 않았다. 따라서 터키(튀르키예)가 저지른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같은 일은 없었다. 해당 기사가 궁금하다면, 네이버나 구글에 ‘고려인 강제이주 과하게 덧칠됐다.’를 검색하면 된다. 해당 링크는 여기에 있다.   

2014년 연합뉴스 기사: 아래의 링크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40610075600022     


실제로 고려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침공한 독일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한국에서 높게 평가하는 봉오동 전투의 영웅인 홍범도 장군 또한, 강제이주를 당했음에도 소련을 위해 소련군으로 참전하고자 한 일화는 유명하다. 비록 고려인의 독소전쟁 참전이 많았다고 할 수 없지만, 2019년에 나온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모스크바 전투에 적어도 2명, 레닌그라드 방어전에는 21명,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16명, 쿠르스크 전투에는 8명, 베를린 공세작전에는 11명, 그리고 1945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진행된 첫 승리 퍼레이드에는 한인 2명이 참가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독소전쟁 참전 고려인은 대략 372명 정도인데, 이들 중 절반이 전사했다고 한다.

      

스탈린에게 충성했다는 모 국내 기사: 해당 기사는 우익적 시각에서 홍범도를 비난한 것이지만, 홍범도가 친소적 성향을 가진 독립운동가인건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인 출신 소련군 참전용사인 민 대위의 묘.

그 외에도 소련군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전투인 대일전에 참전한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소련의 붉은군대로서 청진 해방전투에 참여한 정상진의 경우 전투에 참여하여 일본군 주력부대가 투항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해방 이후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하면서, 적잖은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가서 초기 정권에 참여했다. 즉, 이들이 바로 북한 정치의 한 파벌인 소련파였다. 고려인들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및 사회주의 건설에 적잖은 참여를 했다. 비록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소련파가 숙청되고, 이들 대다수가 소련으로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반도 이북에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는 사실은 “소위 대다수 한국사람들이 생각하는 소련을 혐오할 것만 같은 고려인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역사다.     

해방 이후 고려인들: 해당 포스터는 구글에서 찾았다.

물론 고려인들 중 소련 해체를 경험한 젊은 세대들은 사회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이들도 제법 많다. 특히나 소련 해체 이후 고려인 강제 이주의 비극적인 서사가 한국 사회로 퍼지면서, 이로 인한 영향이 결코 적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소련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글쓴이는 고려인 강제 이주로 인한 피해자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스탈린이 이들을 무작정 탄압만 했던 존재로 인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에, 한국 사회가 주장하는 것과는 다른 측면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출세의 기회와 생활의 어려움을 가장 많이 겪은 것은 소련 시대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어 사회주의 국가가 제공하던 복지와 기회를 잃어버리면서부터였다. 한국 사람들은 소련의 해체를 마치 역사의 승리로 생각하다 보니, 그 이후에 고려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거세하고 역사를 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역사적 인식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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