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로운가?
게임은 기본적으로 시스템의 집합이다.
모든 움직임, 상호작용, 전투, 자원 관리, 심지어 대화까지도 프로그래밍된 규칙에 의해 제어된다. 마치 우리가 물리 법칙, 사회 규범, 그리고 문화적 규약에 따라 움직이는 현실의 구조와도 같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이러한 시스템적 틀이 진정한 자유를 억압하는 방식에 대해 질문한다. 우리는 단지 허용된 틀 안에서 제한된 자유를 경험하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RIM WORLD라는 게임은 유저가 우주 식민지를 건설하고 관리하는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유저는 수많은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선택은 시스템이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유저는 건물을 짓고, 자원을 관리하며, 식민지 주민의 관계를 형성하지만, 그 모든 과정은 결국 프로그래밍된 규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식민지 주민의 성격, 기분, 건강 상태, 심지어 날씨와 자원 분포까지도 모두 복잡한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된다. 즉, 유저는 진정한 창조자가 아니라, 시스템의 제한된 가능성 안에서 움직이는 존재로 변모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된 자유는 때로 유저에게 더 큰 의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완벽한 자유는 때로 공허하며, 명확한 규칙이 없을 때 우리는 방향을 잃기 쉽다. 자유는 단지 선택의 폭이 넓은 상태가 아니라, 그 선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구조를 필요로 한다.
이때 시스템은 단순한 제약이 아니라, 의미의 토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RimWorld의 주민들은 단순한 AI 객체가 아니라, 각각의 욕망, 두려움, 관계를 가진 개별적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그들은 배고프면 음식을 찾고, 두려우면 도망가며, 사랑하면 결혼을 고려하고, 복수심이 생기면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 복잡한 관계망은 단지 기계적 반응이 아니라, 유저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야기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적 자유는 때로 진정한 선택의 환상을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유저는 수백 가지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된 가능성 안에서만 움직인다. 무작위성은 단지 확률적 통제일 뿐, 진정한 혼돈이나 자발적인 자유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허용된 틀 안에서의 자유를 경험하는 것에 불과한가? 혹은 그 틀 안에서도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또한, 이러한 시스템적 자유는 때로 선택의 무게를 감소시키기도 한다. 모든 결과가 단지 확률의 산물이라면, 그 선택은 단지 데이터의 변주에 불과하다. 실존주의는 “선택의 의미는 그 결과의 무게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 무게를 단순한 숫자로 환원해버릴 위험이 있다. 그럴 때 유저는 단지 버튼을 누르는 기계적 존재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유를 고민하는 주체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정말 자유로운가? 아니면 단지 시스템이 허용한 자유를 가장한, 통제된 가능성 안에서만 움직이는 존재인가? 자유는 단지 많은 선택지가 아니라, 그 선택이 실제로 의미를 가지는 순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시스템이 아니라, 유저 스스로가 부여해야 한다.
만약 시스템이 정교하게 설계된 틀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혼돈이 있다. 질서 없이 펼쳐지는 자유, 예측할 수 없는 상황, 그리고 어떤 규칙도 강제하지 않는 공간에서 유저는 과연 더 자유로워지는가? 아니면 무정부적 혼란 속에서 오히려 무력한 존재가 되는가?
이 질문은 자유를 단순히 제한의 부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드러낸다. 실존주의는 단지 제약이 없다는 이유로 그 공간을 ‘자유롭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혼돈 속에서 방향을 잃을 때, 인간은 실존의 바닥에 도달한다”고 본다. 진정한 자유란 선택지가 무한한 상태가 아니라, 혼돈 속에서도 자기 존재를 해석하고, 그 안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좀보이드라는 게임을 살펴보자, 이 게임은 자유와 혼돈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를 제시한다. 게임은 유저에게 기본적인 생존 목표 외에 어떠한 구체적인 임무나 서사를 제공하지 않는다. 좀비로 가득 찬 세계, 붕괴된 사회, 거대한 오픈 월드 속에서 유저는 스스로 식량을 찾고, 거처를 마련하며, 다른 생존자와 관계를 맺거나 회피하거나, 스스로의 삶의 방향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 구조는 유저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자유는 동시에 극단적인 불안과 책임을 수반한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군가를 구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나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은 시스템이 아닌 나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대답은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하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다.
혼돈이란 단지 규칙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규칙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상태, 즉 아무도 대신 정해주지 않는 책임의 공간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우리는 자유를 선고받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가 자유롭기 때문에 모든 선택의 결과를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Project Zomboid의 세계는 단순한 ‘생존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그것은 유저가 매 순간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무대다. 오늘은 누구를 살리고, 어디에 정착하고, 무엇을 소중히 여길 것인지. 그리고 그 모든 선택은 언제나 실패할 수 있으며, 그 실패는 다음 삶의 방향에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혼돈 속의 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규칙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규칙으로 세우는 상태다. 이때 유저는 단지 혼돈을 살아가는 생존자가 아니라, 그 혼돈 속에서 자기 삶을 의미 있게 구성해내는 존재가 된다.
완전한 자유는 때로 공허함을 낳는다.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우리는 마비되고, 그 어떤 선택도 진정한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이 상태는 불안 혹은 실존적 무의미로 설명된다. 모든 외적 기준이 사라졌을 때, 인간은 자신이 선택의 전부라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규칙이 부재한 세계에서는 정답도, 기준도, 비교 대상도 없다. 좋은 플레이와 나쁜 플레이, 효율과 비효율, 도덕과 비도덕조차도 외부에서 규정해주지 않는다. 이때 유저는 스스로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지 결정해야 하며, 그 판단에 따르는 결과도 모두 자기 몫으로 감당해야 한다.
이런 상태는 자유의 극단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본질적으로 고립된 존재로 만든다. 무수한 가능성이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그중 어느 것도 자연스럽게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실존주의는 이 지점에서 “의미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라는 명제를 꺼내든다.
즉, 유저가 의미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유롭게 집을 짓고, 다른 사람과 상호작용하고, 스토리를 무시하거나 새로 만들 수 있는 게임이라 하더라도, 그 자유는 자동으로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저는 자문하게 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정말 나에게 중요한가?”, “이 게임에서 나란 존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이 질문은 단순한 게임 플레이의 고민이 아니라, 실존적 자기 물음이다. 내가 규칙을 만들 수 있다고 해서 그 규칙이 즉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의미는 오직 나의 몰입, 나의 신념, 나의 책임을 통해서만 생겨난다.
이때 유저는 단순한 시스템 사용자에서 벗어나 세계에 의미를 새기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를 향한 끊임없는 질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윤리적 책임, 자유의 불안을 감당하는 용기, 이 모든 것이 규칙 없는 세계에서 ‘살아있는 존재’로 존재하는 방식이다.
현대 게임 속 자유는 종종 가벼운 체험으로 포장된다. 유저는 수많은 선택지를 누르고, 다양한 경로를 시도하며, 결정과 결과 사이를 빠르게 오간다. 되돌리기, 세이브/로드, 분기 회수 등 게임 시스템은 유저가 부담 없이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실존주의적 자유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단지 선택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고, 그 무게를 견디는 과정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외부 규범이 사라진 자리에서, 나는 나의 모든 선택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도 나를 대신해서 정답을 내려줄 수 없고, 어떤 체계도 내 삶의 방향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이때 자유는 곧 고통이며 부담이며 불안이다. 왜냐하면, 선택은 곧 나 자신을 정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이 실존적 자유는 자주 마주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게임은 선택이 곧바로 명확한 보상 또는 패널티로 이어지고, 그 보상은 다시 시스템이 제공한 목표 안에 귀속된다. 결과적으로 유저는 자신의 선택에 도덕적 책임을 지기보다는, 전략적 유불리를 기준으로 결정을 내린다. 이때 유저는 시스템의 일원일 뿐, 진정한 자유의 주체로 기능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어떤 게임이 선택을 되돌릴 수 없고, 결과를 회피할 수도 없으며,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만든다면, 그 순간 유저는 진정으로 실존적 결단의 고통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결단은 단지 서사를 바꾸는 기제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 선택은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 그리고 궁극적으로 정체성의 문제가 된다.
실존주의에서 자유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형성하는 행위다. 유저가 시스템의 의도를 넘어서 스스로의 목적을 부여하고,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며, 그 결과를 감당할 때, 비로소 자유는 행동의 가능성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 된다.
자유는 무한한 선택지를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선택의 무게에 눌리면서도,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때 유저는 더 이상 엔터테인먼트의 소비자가 아니라, 자유와 책임 사이에서 실존을 감당하는 실질적 주체가 된다.
게임은 대부분 질서의 언어로 짜여 있다. 시작 조건이 있고, 목표가 있으며, 도달 가능한 결말이 있다. 그 틀은 예측 가능성이라는 안정을 주고, 유저는 그 안에서 점진적 성취감을 경험한다. 그러나 실존은 이처럼 깔끔하게 정렬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혼돈과 질서의 경계에 놓인다. 그리고 실존주의가 강조하는 인간은, 바로 그 경계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유저는 게임 속에서 주어진 질서에 순응할 수도 있고, 그 질서를 깨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유저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이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반복해서 되묻는 태도다.
질서를 따르는 것이 나의 가치와 맞닿아 있다면, 그 따름조차 하나의 실존적 선택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혼돈 속에서 방향을 잃고, 무작위성 속에 나를 던져보는 것도 나의 자유를 실험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이때 게임은 단순한 경험의 도구가 아니라, 자유와 의미 사이의 관계를 시험해보는 실존의 무대가 된다. 그리고 유저는 더 이상 ‘정해진 서사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 서사 안팎에서 끊임없이 스스로의 존재를 검증하고 새로 만들어내는 사유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그렇기에 게임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이 세계의 규칙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해체하고, 새롭게 구성할 것인가?”
이 질문은 단지 게임 내 행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떤 존재로 이 세계에 등장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매 순간 갱신된다. 퀘스트를 받을 때, 길을 선택할 때, 규칙을 어길 때,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 질서와 혼돈의 경계에서, 우리는 비로소 ‘누구인가’를 결정할 기회를 갖게 된다.
게임은 철저히 설계된 세계다.
그러나 그 세계를 살아가는 유저는 단순한 기계적 소비자가 아니다. 그는 주어진 구조 안에서 스스로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 선택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존재다.
자유란, 그저 선택지를 고르는 행위가 아니라, 그 선택에 의미를 부여하고, 책임을 지며, 그 의미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질서는 안전하지만 제한되고, 혼돈은 위험하지만 창조적이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유저로서가 아니라, 실존적 존재로서 시험받는다.
그리고 그 순간, 게임은 단지 오락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선택을 반복하며 살아가는지, 내 자유는 진정한가를 되묻는 철학의 장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