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실존주의 [12] - 규칙 없는 공간

유저는 세계에 의미를 새길 수 있는가?

by 엠알

규칙이 사라질 때 찾아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불안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유’는 흔히 긍정적인 개념으로 소비된다. 구속 없는 상태, 원하는 것을 원하는 방식으로 행할 수 있는 권리. 게임 역시 이런 인식을 반영한다.


많은 오픈월드 게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장 중요한 상품 가치로 내세운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눈으로 바라보면, 자유는 해방의 감정이 아니라 불안의 조건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세상에 ‘던져진’ 상태로 정의한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시대, 국가, 가족, 환경에 태어나며, 삶의 이유나 방향도 없이 세계 한가운데로 내던져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간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절대적 자유는 곧 불안(Angst)으로 나타난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기댈 질서나 기준이 없으며, 내가 내린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 상태. 이것이 실존적 불안이다.


게임에서 이 불안은 시스템이 유저에게 명확한 목표를 주지 않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The Long DarK의 ‘생존 모드’는 유저에게 어떤 이야기, 미션, 분기 구조도 제공하지 않는다.


오직 얼어붙은 북부 숲과 거기서 살아남는 조건만이 주어진다. 처음엔 해방감이 있다.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곧 유저는 목표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 방황하게 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 게임에서 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지 게임이 불친절해서가 아니라, 의미 없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실존적 불안의 반영이다.


실존주의는 이 상태에서 인간이 두 가지 선택을 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회피. 자신을 규칙 속에 숨기고, 주어진 틀 안에서 움직이며,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 삶. 사르트르는 이를 ‘자기기만(Bad Faith)’이라고 부른다.


다른 하나는, 그 불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내가 누구이고, 왜 이 게임(삶)을 계속하는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행위다.


게임이 규칙을 제거하거나, 목표를 제시하지 않을 때, 그 세계는 유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선택은 왜 당신에게 의미 있는가?”


실존주의에 따르면, 이 질문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유저는 ‘플레이어’가 아니라 실존하는 존재로 변한다.

단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게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경험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시스템이 없는 공간은 유저를 고독하게 만든다


게임은 언제나 일종의 시스템 환경이다. 플레이의 경로와 규칙을 설계한 루디컬(rules-based) 구조 위에서 유저는 선택하고, 행동하고, 결과를 맞이한다. 이 시스템이 잘 작동할수록 유저는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듯한 착각 속에서 게임이 허용한 자유를 자연스럽게 소비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없는 공간, 혹은 시스템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상태에 놓였을 때 유저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자문하게 된다.


그 질문은 기술적이거나 기능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존재론적 고독으로 이어진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세계 안에 내던져진 존재(Dasein)”로 규정했다. 던져졌다는 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세계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며, 그 던져진 상태에서 인간은 삶의 방향과 가치를 스스로 정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이 ‘정해야 하는 상태’는 해방이 아니라 막막함의 시작이다.


게임 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상황은 만들어질 수 있다. 특히 샌드박스, 서바이벌, 논선형 오픈월드에서 유저는 특정 목표가 제시되지 않거나, 지속적으로 목표가 붕괴되는 구조 속에 놓인다.


예를 들어, Cataclysm: Dark Days Ahead는 세계 종말 이후의 생존을 그린 게임으로, 튜토리얼도, 정해진 퀘스트도, 서사적 흐름도 없다. 유저는 쓰러져가는 마을과 불친절한 시스템 안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가?”라는 실존적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이 질문은 단순히 ‘어디로 가야 하는가’가 아니라 “내가 왜 이 세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가”라는 의미의 결핍을 가리킨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의미도 본래적으로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삶의 의미는 애초에 없는 것이며, 그 의미는 각자가 부여해야만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유저가 이 책임을 기꺼이 떠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자기기만으로 돌아선다. 즉, 시스템이 다시 방향을 설정해주기를 바라며, 정답을 제공하는 퀘스트를 원하고, 다양한 결과가 있더라도 ‘최적화된 루트’를 찾으려 한다. 왜냐하면 자기 스스로 목적을 만들고, 그것을 살아내는 일은 두렵고, 외롭고, 실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이 회피를 무엇보다도 자기의 부정이라 비판한다. 자유를 포기하고자 하는 충동은, 내가 나로 살기보다 타인의 기대 속에 숨고자 하는 욕망이다. 게임은 그런 회피를 쉽게 허용한다. 로드, 세이브, 공략, 확정 보상. 우리는 언제든 정해진 구조 속에 자신을 다시 집어넣을 수 있다.


하지만 규칙 없는 세계에 남는다면, 그리고 그 세계 안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으려 한다면, 그 유저는 진정한 실존적 존재로서 자기 고독을 감내하고, 자기 목적을 창조하는 자가 된다.


이때 고독은 단지 외로움이 아니다. 그것은 의존하지 않기로 선택한 인간의 형식, 그리고 자기 존재를 만들어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자유는 선택지의 수가 아니라, 선택의 무게에서 드러난다


게임에서 자유를 이야기할 때, 흔히 그것은 ‘선택의 폭’으로 측정된다. 다양한 캐릭터 빌드, 수십 가지 엔딩, 수백 개의 퀘스트. 유저는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이 개념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자유는 수량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이다. 몇 개의 선택지가 있는지가 아니라, 그 선택이 진짜 나의 것인가, 그리고 그 결과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가에 따라 자유는 의미를 갖는다.


사르트르는 자유를 피할 수 없는 구조로 설명했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선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은 언제나 나를 드러내는 행위다. 실존적 자유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음’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 내가 한 것임을 인정할 수 있음’이다.


게임 안에서도 이런 실존적 자유는 찾아올 수 있다. 특히 선택의 결과가 되돌릴 수 없고, 그 결정이 단순한 서사 변화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이나 정체성의 변화로 이어질 때, 유저는 시스템이 만든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결단의 무게와 마주하게 된다.


예를 들어, This War of Mine은 전쟁 중 민간인의 생존을 다룬 게임으로, 선택의 대부분이 도덕적 회색지대에 존재한다. 유저는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웃의 집에 침입하거나 노약자를 희생시키는 등의 ‘비효율적이지만 인간적인’ 혹은 ‘효율적이지만 잔인한’ 결정을 반복해서 마주하게 된다. 게임은 어떤 선택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결과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고, 캐릭터의 감정 상태와 공동체의 와해로 드러난다.


이 순간, 유저는 시스템이 허용한 선택지가 아니라 자기 윤리의 경계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식의 자기기만으로 포장되지 않고, 정말로 **“그건 내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유의 조건 안에 들어서게 된다.


이때 자유는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무겁고, 피로하며, 회복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그 어떤 외부 근거 없이 스스로 대답해야만 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실존주의에서 자유는 즐거움이 아니라 책임, 확장성이 아니라 결단, 다양성이 아니라 진정성이다.


게임은 종종 자유를 팔지만, 실존주의는 그 자유를 살 준비가 되었는지를 묻는다.


책임을 되묻는 윤리의 시작


우리는 보통 규칙이 존재할 때만 윤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법이 있어야 불법이 있고, 룰이 있어야 반칙이 존재하며, 지침이 있어야 도덕적 판단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그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윤리란 주어진 규칙을 따르는 태도가 아니라, 아무 규칙도 없을 때 스스로 만든 기준을 살아내는 실천이다. 사르트르의 윤리학은 이 점에서 매우 급진적이다.


“내가 하는 선택은, 인류 전체를 위한 선택으로도 괜찮아야 한다.”


이것은 칸트의 정언명령을 연상시키지만, 사르트르에게 중요한 것은 ‘보편 윤리의 존재’가 아니라, 보편성의 기준을 자기가 감당하려 드는 태도다. 그는 인간을 윤리적 입법자로 바라봤다. 타인이 강제한 법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이 모두에게 적용돼도 괜찮다고 믿는다면, 그 선택은 윤리적이다.


게임에서 이런 윤리는 흔히 발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윤리 시스템은 보상과 패널티를 전제로 설계된다. ‘악역 루트’, ‘선행 포인트’, ‘명예 수치’는 윤리를 도덕적 스타일로 만들 뿐, 실제로 윤리적 결단의 조건을 제공하지 않는다. 윤리란 보상이 아니라, 비용을 감수하는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게임은 유저가 규칙 없이도 자신만의 기준을 설정하고, 그 기준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시도 속에서 실존적 윤리와 유사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예컨대, Kenshi는 어떠한 명확한 서사도, 윤리적 선택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 게임이다. 유저는 노예로 시작해 자유인이 될 수도 있고, 약자를 도우며 공동체를 만들 수도 있으며, 반대로 무력으로 도시를 장악하고 약탈을 일삼을 수도 있다. 게임은 그 어떤 선택에도 도덕적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저가 일정한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을 지속적으로 실천할 경우, 그 플레이는 단순한 전략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규율하는 윤리적 행위로 전환된다.


이때 중요한 건 그 규칙이 게임이 제시한 ‘좋은 선택’이냐가 아니라, 그 규칙이 나에게 왜 의미 있는가, 그리고 그 원칙을 나는 감당할 수 있는가다. 내가 만든 규칙이 타인의 세계를 파괴하거나 왜곡한다면, 그 책임 역시 나의 몫이다.


이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윤리적 자유’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이 나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태도.


결국 자기 규칙이란, 자신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자, 그 세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이 타자 앞에서도 지속 가능한가를 스스로 되묻는 순간, 비로소 유저는 시스템 바깥에서 윤리적 실존을 구성하게 된다.


실존은 시스템을 넘어서지 않아도 가능하다


게임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제한적이다.


모든 환경은 프로그래밍되고, 선택지는 미리 정의되어 있으며, 세계의 규칙은 유저가 아닌 개발자가 설정한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진짜 실존적 자유는 시스템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존적 자유란 시스템을 넘어서야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시스템 안에서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다.


실존주의는 자유를 ‘제약 없는 상태’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약이 있는 가운데서도 그 제약을 스스로 수용하거나, 거부하거나, 재해석하는 순간에 자유는 시작된다고 본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다. 중요한 건 던져진 상태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선택의 주체로 설 수 있느냐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어떤 유저는 매우 닫힌 구조 속에서도 스스로의 규범을 만들고, 그 규범을 통해 시스템을 해석하며, 의미 있는 선택을 구성해낸다. 반대로, 무한한 오픈월드 안에서도 모든 선택을 회피하거나 공략과 효율의 언어로만 플레이하는 유저도 있다. 두 경우 모두 시스템은 동일하다. 차이를 만드는 건 실존의 태도다.


실존은 시스템의 부정이 아니라, 자기 선택을 향한 책임의 태도로 증명된다. 그것이 주어진 선택지일지라도, 그 선택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결단의 순간이 있다면, 유저는 단순한 플레이어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실존적 주체로 서 있는 것이다.


게임은 책임 없는 선택이 아닌, 책임의 훈련이 될 수 있을까


실존주의는 말한다. 우리는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 선택의 모든 결과는 우리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고.


게임은 선택을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선택의 결과를 쉽게 되돌릴 수 있고, 의미 없이 반복할 수 있으며, 책임이 시스템적으로 소거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자주 자유의 흉내만을 낸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 선택의 순간에 정말로 나의 기준으로 결정하고,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는 나로서 받아들인다면, 그때 게임은 단지 오락이 아니라 실존의 형식을 실험해볼 수 있는 윤리적 공간이 된다.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실패하고, 고립되고,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바로 그 불안과 실패의 순간에서 인간이 자신을 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이 선택은 나의 것인가?”, “그리고 나는 그 선택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게임 속에서도 실존하는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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