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세계에서의 실존적 응시
현대인의 일상은 점점 더 게임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단지 오락의 수단을 넘어, 게임은 자기 표현, 사회적 상호작용, 감정적 경험의 장이 되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친구를 만나고, 정체성을 구성하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실패하고, 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짜 삶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게임 속 실존은 현실의 실존을 대체하거나 보완할 수 있는가?"
실존주의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자각하는 유일한 동물이라 본다. 우리는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고 있음을 끊임없이 되묻는 존재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행동하는가’. 이 질문들은 실존의 토대이며, 그 질문이 부재한 삶은 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시선 안에서 살아가는 비실존적 존재”다.
그렇다면 게임 안에서 우리는 과연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는가?
아니면 게임은 그 질문들을 망각하게 만드는 쾌락적 환상인가?
현실이 주는 고통, 복잡성, 불확실성은 크다.
이에 비해 게임은 정제된 규칙, 목표 지향적 구조, 보상 체계가 명확한 세계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현실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가상세계에서 ‘보다 나은 자아’를 실험하려 한다.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실존주의는 이상적인 ‘진짜 세계’를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공간에서 살든, 자기 존재를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는가다.
예컨대, Death Stranding은 게임 세계 속에서 ‘운반’이라는 행위를 반복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유저는 자신이 왜 이걸 하고 있는지를 점점 자문하게 된다. 그 질문이 단순한 효율 문제를 넘어 ‘내가 이 세계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싶은가’, ‘타인의 존재와 어떻게 연결되고 싶은가’로 이어질 때, 그 순간 유저는 가상세계 안에서도 실존적 사유에 도달하게 된다.
결국 도피와 응시의 차이는 장소가 아니라 태도다. 같은 게임 안에서도 누군가는 오직 통제감과 보상만을 좇는 도피자일 수 있고, 누군가는 삶의 윤리와 감각을 실험하는 존재일 수 있다. 중요한 건 게임이 현실과 같아야 한다는 게 아니다. 실존주의는 “너는 네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진지하게 보고 있느냐”고 묻는다.
게임은 그 세계가 현실이든 가상이든 상관없이, 그 세계 안에서 유저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책임을 지며,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통해 실존적 공간이 될 수 있다.
실존은 단독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각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비추는 세계와 타인의 응시, 그리고 그 응시 속에서 홀로 서려는 고독이 필요하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나의 지옥”이라 말했지만, 그 말은 타인을 배제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나를 인식하게 된다는 역설적 진리를 품고 있다.
게임은 이 관계를 강하게 압축해 보여주는 매체다. 특히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유저는 자신의 플레이가 타인의 평가와 반응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게 된다. 내가 어떤 캐릭터를 고르고, 어떻게 협력하고, 때로는 어떻게 배신하는가. 그 모든 행동은 타인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정의하는 실존적 행위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이 시선이 종종 ‘자기 존재의 연출’로만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를 ‘시선 속의 대상화’라 부른다. 나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타인이 보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으로 존재하려고 한다. 이 순간, 실존은 퇴색한다. 나는 더 이상 선택하는 자가 아니라, 선택이 연출된 무대 위의 배우가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방식도 제시한다. 바로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고독’은 단순히 혼자인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을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이다. 게임 속에서 진정한 실존의 장면은 이 고독의 순간에 발생한다.
Death Stranding에서의 오랜 여정은 타인과 단절된 세계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묵묵히 반복하게 만든다. 그 반복 속에서 유저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나가 아니라,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스스로 구성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몰입이 아니라, 실존주의가 말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응답’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이 언제나 어떤 세계 안에서, 어떤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게임이라는 가상세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어떤 타자와 마주하고, 어떤 고독을 견디며, 어떤 세계를 구성해나가는지를 통해 유저는 실존의 조건에 가까워질 수 있다.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가볍지 않은 철학이다. 그 어떤 초월적 본질도 없이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자기 존재의 의미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 그 과정에는 망설임이 있고, 실패가 있으며, 그 모든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삶의 무게’다. 이 무게는 외부로부터 강제되지 않는다. 내가 감당하기로 선택한 내 삶의 의미가 곧 나에게 무게가 된다.
하지만 게임은 이 무게를 거의 제거한다. 현실에서 하나의 선택은 수많은 가능성을 닫아버리지만, 게임에서는 ‘되돌리기’나 ‘분기 저장’, 또는 단순히 ‘다시 시작’이라는 선택지를 통해 그 무게를 가볍게 만든다.
그 덕분에 유저는 마음껏 실험하고, 다양한 루트를 경험하며, 실패와 성공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결정’은 점점 더 게임의 기능이 되어간다. 그 결정이 진짜 나를 반영하지 않아도, 단지 ‘결과가 나쁘면 바꾸면 된다’는 태도만이 남는다.
실존주의는 여기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지금 그 선택을 진심으로 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게임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일부 게임은 이 질문을 시스템적으로 유저에게 돌려주기도 한다.
예컨대, Papers, Please는 국경 심사관이라는 직업을 통해 유저에게 윤리적 판단을 반복적으로 요구한다. 내가 가족을 위해 뇌물을 받을 것인지, 정의감을 위해 시스템에 반기를 들 것인지, 혹은 아무 감정 없이 규칙만 따를 것인지. 그 어떤 선택도 게임은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끝까지 유저가 감당해야만 한다.
실존의 무게는 강요된 결과에 있지 않다. 그것은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외면하지 않고 살아내는 태도에 있다.
유저가 스스로에게 “이건 내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결과에 담긴 윤리적 파장을 피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실존적 경험을 제공한 것이다.
실존은 정해진 스토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스토리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진짜 삶’이라는 이름의 게임 바깥에서도 계속 이어져야 한다.
게임은 끝난다.
플레이타임이 종료되면, 우리는 저장을 마치고, 타이틀로 돌아가고, 전원을 끈다. 이후 다시 돌아올 수도 있지만, 한 번의 플레이는 언젠가 끝을 가진 사건이다. 그리고 그 끝은 유저에게 질문을 남긴다. “지금까지 했던 경험이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실존주의는 인간을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자신을 투사하며 살아가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이 끝났을 때 그 경험이 유저 안에 변화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면, 그 플레이는 실존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변화는 기억 속에서 일어난다. 기억이란 단순히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능이 아니라, 경험을 의미화하는 작업이다.
그 게임이 유저에게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그 선택이 이후 삶의 판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그 관계성과 감정이 어떻게 내면화되었는지를 통해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
실존주의적 삶이란 바로 이 지속적인 의미의 구축에 있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는가”를 돌아보고, “그렇다면 나는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 이런 태도가 있다면, 게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철학적 사건이 된다.
Journey처럼 대사가 거의 없는 게임조차 그 여운을 통해 유저에게 무언가를 사유하도록 유도한다. 플레이 내내 유저는 누군가와 함께 걸어가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않으며, 마지막에 이별만을 남긴다.
그러나 이 만남은 “타인과 내가 짧은 시간 안에서 어떻게 존재했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새기게 한다. 그 만남이 실재하지 않았음에도, 그 감정은 가짜가 아니다. 그렇게 남은 감정과 질문은 유저를 이전과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바로 그것이 실존주의가 중요하게 여기는 ‘경험 이후의 변화’, 그리고 ‘변화 이후의 지속’이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삶은 단지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시간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게임이 끝난 후, 그 세계가 무엇을 남겼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유저의 삶에 작게나마 존재의 흔적을 남긴 것이다.
우리는 게임을 통해 수많은 세계를 경험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용사가 되고, 심사관이 되며, 외로운 여행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우리에게 묻는 것은, “그 안에서 너는 누구였는가?”이다. 이 질문은 단지 캐릭터의 역할이나 결말을 묻는 것이 아니다. 그 선택이 네 것이었는지, 그 책임을 받아들이려 했는지, 그 삶이 너를 바꾸었는지를 묻는다.
실존주의는 이처럼 불편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반복과 편의, 세이브와 로드를 통해 가벼운 삶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무겁게 만들어주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선택이 의미를 갖고, 그 의미가 흔적으로 남으며, 그 흔적이 나의 기준이 될 때다.
게임은 실존적 삶의 축소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스템이 실존을 대신해준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 시스템은 항상 우리를 기능적 존재로 이끌며, 정답과 효율, 보상과 성장을 기준으로 삼게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실존은, 효율보다 윤리, 보상보다 질문을 선택하는 순간에만 드러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외부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내가 내게 던지는 것이다.
“나는 왜 이 선택을 했는가?”
“그 결과는 어떤 의미였는가?”
“나는 지금 어떤 존재로 남았는가?”
게임이 이 질문들을 유도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단지 오락이 아니라, 나를 직면하게 하는 거울이자 또 다른 존재의 장이 된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것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다. 자신이 되는 연습을 멈추지 않는 존재다.” 그리고 그 연습은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가상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 이제 다시 묻자. 게임은 진짜 삶을 대체할 수 있는가?
아마 우리가 그것을 진짜 삶처럼 살아내려는 태도를 가졌을 때만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