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너머의 철학적 흔적과 감응의 가능성
실존주의는 끝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을 직시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은 존재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라 말했다. 사르트르는 “자신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끝까지 살아내는 행위”라고 했다. 이 말들은 모두 실존주의가 하나의 구조적 출구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재확인하고 갱신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주체성을 전제로 삼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철학이 게임이라는 매체와 만났을 때,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게임이 끝난 이후에도 실존은 남을 수 있는가?”
그간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들—던져짐, 선택, 책임, 불안, 실패, 허무, 타자, 윤리 등 을
게임의 메커니즘과 유저 경험을 통해 하나씩 풀어왔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단지 게임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는 철학이 아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에 도달한 지금, 우리는 반드시 물어야 한다. 플레이가 멈춘 이후에도 실존은 유효한가? 유저는 게임을 통해 무엇을 감당하게 되었는가?
게임은 이야기이기도 하고, 놀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게임은 그 이상이다. 자신을 투사하고, 자신의 선택과 실패를 감당하며, 그로 인해 자신의 윤리를 다시 쓰는 공간이다. 이 공간이 단지 스코어와 성과로 끝나는가, 아니면 플레이 종료 이후에도 유저의 감정과 태도에 변화를 남기는가. 그 차이가 바로 실존의 흔적이 남는가를 가르는 핵심이다. 이번에는 시리즈를 마무리 하며 그런 실존의 흔적이 어떤 방식으로 게임 이후에도 이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여운이나 감상이 아닌, 유저라는 존재의 인식과 선택을 바꾸는 방향성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살핀다. 특히 서사 중심 스토리텔링 게임이 아닌, 의외의 영역에서 실존주의의 흔적을 남기는 두 개의 예시를 분석한다.
첫 번째 게임은 데이브 더 다이버 이다. 처음에는 탐험과 수집, 레스토랑 경영이라는 조합이 매력적인 캐주얼 게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게임은 ‘수심 깊은 바다에 스스로를 던져넣는 감각’과 ‘가벼운 표정 속에 숨은 존재의 무게’를 서서히 드러낸다. 바닷속을 탐사하는 유저는 자주 죽고, 도전하고, 실패한다.
그럼에도 다시 바다로 향한다. 여기엔 반복이라는 게임 메커니즘 너머에, 실존주의가 말하는 “던져짐”의 구조, 즉 의미 없는 세계에 계속해서 스스로를 던져야만 하는 인간의 조건이 묻어난다.
데이브 더 다이버는 명시적으로 실존 철학을 말하지 않지만, 그 체험이 주는 반복의 피로감, 성공 뒤의 공허감, 그리고 끝이 없음에도 멈출 수 없는 열중은 실존주의의 감각을 비추는 미묘한 거울이다.
이런 구조는 단순히 ‘재밌다’는 감정에서 끝나지 않는다. 게임을 끈 뒤에도 유저는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나는 왜 이 바다에 다시 들어가는가?”, “이걸 통해 나는 무엇을 완성하고 있는가?”. 그 질문은 곧, “내가 이 세계에서 나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으로 이어진다.
두 번째 게임은 스팀 인디 게임인 Return of the Obra Dinn이다. 이 게임은 해상에서 사라진 선박의 비밀을 파헤치는 보험조사관의 이야기를 다룬다. 유저는 게임 속에서 ‘완성된 서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서사를 ‘스스로 구성’해야 한다. 누가 누구인지, 언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든 정보는 관찰과 추리, 그리고 직접적인 ‘이해’의 과정을 통해 조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답을 맞히는 것이 실존이 아니라, 그 답을 향해 스스로 해석하고, 의심하고, 책임지는 과정이 실존이라는 점이다.
이 독특함은, 단순한 추리나 퍼즐을 넘어서, 유저가 진실을 ‘본다’고 느낄 때 양심적인 감정의 진동이 생긴다는 것이다. 선원들이 죽은 이유, 그들이 내린 결정, 폭력의 순간, 침묵의 장면…이 모든 것들이 서사적 팝업으로 설명되지 않고, 유저 스스로 ‘직면’해야 하는 윤리적 파편들로 남는다.
이런 구조에서 유저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다. 진실을 알아낸 자로서, 진실을 감당해야 하는 자가 된다. 이 감정은 게임을 끈 뒤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데이브 더 다이버는 무의미 속에서 반복을 견디는 자로서의 실존, Return of the Obra Dinn은 진실을 구성하고 감당하는 자로서의 실존을 드러낸다.
둘 다 게임을 마치고나면, 유저 안에 어떤 정리가 아닌 잔여의 감정을 남긴다. 그 감정이야말로, 실존주의가 말하는 “삶의 불확실성과 불완전함에 대한 감응”이다. 유저는 그 감정을 통해, 자신이 게임에서 무엇을 선택했고, 왜 그런 선택을 했으며, 그 선택이 현실의 나와 어떤 윤리적 접점을 만들었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게임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실존은 시스템에 갇히지 않는다. 실존은 시스템을 살아낸 인간의 감정, 해석, 흔들림 속에서만 진짜로 존재한다. 이 진동이 남아 있다면, 게임은 끝났어도 실존은 끝나지 않는다. 그 실존은 유저 안에서 삶의 감각으로 계속 살아 있게 된다.
실존주의에서 책임이란 단순히 법적이거나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롭기에 저주받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는 고통을 말한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선택을 하게 되어 있고, 그 선택의 결과가 의미 있든 없든 간에 그것을 자기가 만든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철학적 윤리가 실존주의다.
그렇다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게임에서의 유저는 과연 진짜로 책임질 수 있는 존재인가?
우리는 게임에서 수많은 선택을 한다. 선택지형 내러티브, 도덕적 분기, 대화 옵션, 또는 행동의 자유와 같은 시스템적 구조를 통해 유저는 다양한 방식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결과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얼마나 되돌릴 수 있는가? 얼마나 가볍게 반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가 나를 얼마나 움직이는가?
게임은 본질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경험이다.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고, 죽으면 리스폰하고, 분기가 마음에 안 들면 세이브 파일을 불러온다. 이러한 재시도의 자유는 시스템 상으로는 유저에게 해방감을 주지만, 실존주의적 맥락에서는 선택의 실존적 무게를 약화시키는 메커니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존은 반복이 아닌 단일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선택, 그 결과, 그리고 그에 대한 감당. 이것이 실존주의적 책임의 구조다.
하지만 게임 안에서는 거의 모든 선택이 반복 가능하다. 이는 유저가 자기 선택을 실험하거나 전략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철학적으로 ‘살아내는’ 태도와는 다소 충돌한다. 여기서 게임은 실존주의와 갈등한다. 유저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되돌림의 자유 속에서 선택을 진짜로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유저는 실존의 주체가 될 수 없는가?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등장한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가능성과, 유저가 택하는 태도 사이의 간극이다. 게임은 언제든 되돌릴 수 있게 설계되지만, 어떤 유저는 그 가능성을 거부한다. 실수를 되돌리지 않고, 감정적으로 힘든 선택을 끝까지 끌고 가며, 그 결과가 불편해도 자신이 결정한 것이기에 책임을 느끼는 태도를 택한다. 이 선택은 시스템 바깥에서 작동하는 내면적 윤리의 작동이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게임 시스템을 통해 유저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니라, 유저 스스로 선택한 감당의 구조를 통해 작동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건 시스템이 아니라 유저가 자신의 선택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이다. 그 반응이 단순한 조작의 결과가 아닌, 심리적 흔들림과 자기반성, 그리고 후속 행동의 변화로 이어질 때, 그때 비로소 유저는 실존주의적 책임을 살아내는 존재가 된다.
실존주의는 외부에서 강요되는 윤리가 아니다. 오히려 외부의 강제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스스로 윤리를 창조해내는 존재가 될 수 있느냐를 묻는다. 이 점에서 게임은 오히려 실존주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시스템은 윤리를 강제하지 않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윤리를 택하는 유저는 온전히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실존주의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나는 누구의 책임도 아닌, 내 존재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이 선언은 게임이라는 환경 안에서, “나는 이 결과를 내가 만든 것으로 감당한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
이 감당이 가능해질 때, 게임은 단지 시뮬레이션을 넘어 유저 개인의 내면적 윤리를 실험하는 공간으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어떤 게임이 이런 실존적 책임감을 유도하는가?
여기서 단 하나의 게임이 아니라, 그 구조가 유저로 하여금 선택의 결과를 해석하게 만드는 방식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어떤 게임은 결과에 대한 팝업 창이나 도덕 점수로 선택의 평가를 대신한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유저 스스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이건 나쁜 선택이야’라는 외부 기준을 적용하여 선택의 책임을 감각적으로 마비시킨다.
반대로 어떤 게임은 아무런 평가를 주지 않는다. 그저 사건이 일어나고, 서사는 이어지며, 결과는 유저에게 맡겨진다. 그 순간, 유저는 진짜로 고민하게 된다. “내가 이걸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의 이 상태는 내 책임인가?”, 이 질문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순간, 유저는 단지 시스템 속 존재가 아니라, 그 시스템 위에서 스스로 윤리를 구성하는 실존적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실존주의의 책임은 게임 시스템이 부여하는 미션의 성공 여부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남았는지를 스스로 해석하고 수용하는 감각에 있다. 유저는 시스템을 해석하고, 그것에 맞춰 움직이는 존재이지만, 그 순간에도 자기 방식으로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기억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는 책임지는 존재로서의 실존을 시작한 것이다.
유저는 단지 게임이라는 구조물 안에 있는 객체가 아니라, 그 구조를 해석하고, 조작하고, 의미를 구성하는
실존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즉, 유저는 시스템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그 시스템을 ‘이해하고 다시 구성할 수 있는 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 시스템은 어떤 식으로 유저에게 해석의 여지를 줄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방식은 불친절함이다.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말해주지 않는 방식이다. 이런 게임들은 유저가 먼저 ‘왜 이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중요한 개념인 ‘의미의 부재 속에서 의미를 만드는 인간’이라는 철학적 조건과 닿아 있다.
이러한 구조를 지닌 대표적인 국내 게임 중 하나는 검은사막 생태계 시스템이다. 검은사막은 단순히 전투와 레벨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거대한 오픈월드 안에서 유저가 자원 채집, 거래, 제작, 탐험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다. 어떤 목표도 절대적인 것이 없으며, 유저가 선택한 생업과 행동에 따라 완전히 다른 플레이 구조가 형성된다.
검은사막은 전형적인 실존적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세계와의 관계를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며, 그로 인해 나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가는지를 인식하게 만드는 구조는 실존주의적 해석의 기반이 된다.
특히 이 게임의 ‘노동’ 개념은 흥미롭다. 다른 RPG 게임에서 노동은 단지 보상을 위한 반복 행위지만, 검은사막에서는 노동이 세계에 자취를 남기고, 경제를 바꾸며, 캐릭터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실질적 행위로 작동한다.
이때 유저는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세계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지를 “인식하는 순간”을 겪게 된다.
실존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 그 자체가 아니다. 그 선택을 해석하는 주체로서의 자기 인식, 즉 “내가 이 선택을 왜 했는가?”를 질문할 수 있는 존재로의 전환이다. 게임이 유저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행위의 결과를 시스템이 평가해주는 것이 아니라, 유저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고민하고, 추론하고, 감당하는 시간과 틈이다. 이러한 ‘해석적 실존’의 감각을 보다 철저하게 실험한 게임으로는
Pathologic Classic HD를 들 수 있다.
이 게임은 시스템적으로는 매우 낡았고, 불편하고, 심지어 플레이를 방해하는 요소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유저는 그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세상의 무의미함과 고통을 직면하게 되고, 자신의 판단과 행동이 세계에 어떤 서사를 남겼는지를 철저하게 자기 해석의 언어로 구성하게 된다.
실패와 허무, 불안과 불확실성의 미학을 강조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저가 이 모든 요소들을 “이건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고 질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 질문이 실존주의의 핵심이다. 외부의 규칙을 무비판적으로 따르지 않고, 그 규칙의 의미를 묻고, 그 안에서 나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되묻는 감각.
유저는 단지 게임 속 캐릭터를 조작하는 손이 아니다. 시스템에 내장된 명확한 승패나 보상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시스템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묻고,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를
반성할 수 있는 주체다.
이때 유저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시스템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넘보는 자가 된다. 즉, 유저는 게임이라는 세계를 단지 사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석하고, 판단하고, 의미를 재구성하는 철학적 존재로서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의 행위는 게임 종료 후에도 유효하다. 유저가 어떤 게임을 끝냈을 때, “재밌었다”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면 그건 바로 그 게임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유저에게 어떤 존재론적 경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시스템이 제공한 것이 아니라, 유저 스스로가 선택하고 구성한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실존주의가 게임 안에서 가능하다는 건, 그 게임이 완성된 의미를 제공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해석의 여백을 남겨두고, 그 여백을 유저 스스로 채우도록 구조화되었을 때, 비로소 유저는 시스템을 넘어선 존재가 된다.
그는 단순한 유저가 아니다. 그는 실존하는 자다. 그리고 실존하는 자는, 자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자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자다.
감응(affect)은 감정보다 원초적이고, 의미보다 앞선다. 우리는 가끔 어떤 장면이나 대사, 혹은 상황의 맥락 전체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때 느꼈던 감정의 잔류를 몸에 새기고 살아간다. 이것이 실존이 남기는 방식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 감응을 만드는 데 있어 특유의 조건을 지닌다.
게임은 서사, 이미지, 사운드, 인터랙션의 총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더 근본적인 건 “유저가 거기 있었고, 움직였고, 감각했다”는 사실 자체다. 이 감각의 누적이 감응으로 이어진다. 게임은 플레이하는 동안 선택을 요구하고, 정체성을 부여하며, 실패와 반복, 갈등과 수용을 통과시킨다.
그 모든 체험이 머릿속 기억이 아니라 몸의 기억, 감각의 자국으로 변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실존은 언제나 모호하고 불편하다. 게임이 시스템적으로 제공하지 않는 경험일수록, 우리는 그 안에서 더 실존적으로 반응한다. 명확한 보상 구조나 완벽한 루프가 아닌, 중단되고, 흔들리고, 방향을 잃는 순간, 유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이 유저 내면의 삶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면, 실존은 감정이 아니라 감응으로, 흔적으로, 잔류물로 유저에게 남는다.
그것은 특정한 결론이나 교훈이 아니다. 오히려 게임이 끝난 뒤에도 해소되지 않고, 그저 “무언가가 내 안에 있다”는 기분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 감각은 유저의 삶 속에서 또 다른 선택이나 사고방식을 촉진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실존이 철학에서 경험으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실존주의는 결코 게임을 위한 철학이 아니다. 하지만 게임이 실존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장이 될 수는 있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게임은 내 삶을 바꿀 수 있는가?” “그 체험은 현실의 나에게 어떤 질문을 남기는가?”
게임은 명확한 룰과 구조 안에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현실보다 안정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안정된 시스템 안에서 불안, 부조리, 실패, 모순, 책임 같은 실존적 요소들이 실험될 수 있다.
게임을 통해 인간은 단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그 역할을 해석하고 감당하는 존재가 된다. 그 과정에서 현실에서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윤리적 선택을 해보고, 권력 구조에 저항해보며, 자기 정체성을 의심해볼 수 있다.
그 결과는 게임의 엔딩이 아니라, 유저 안에 남는 세계의 잔상이다. 게임은 유저에게 “이걸 해라”가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가?“를 질문하는 순간, 그 자체로 실존의 장이 된다.
실존주의는 언제나 나 자신이 누구인지, 내가 선택한 삶은 어떤 의미인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게임을 하며 어떤 선택을 했는지보다, 그 선택 이후에 어떤 해석을 했는가를 중요시한다.
게임 이후에도 그 해석이 계속된다면, 유저는 그 세계를 떠났음에도 그 세계의 사유를 이어가는 실존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게임은 현실을 대체하지 않는다. 그러나 게임은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가치와 윤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 게임은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실존의 리허설 무대가 된다.
게임은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게임은 우리가 누가 되고 싶은지를 선택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