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과 실존주의 13 - 게임은 실존 을 지연시킨다

반복, 저장 그리고 무한의 윤리

by 엠알

세이브는 실존을 유예하는 장치인가?


게임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대부분의 게임은 죽음을 하나의 조건으로 전제하고, 그 결과를 되돌릴 수 있는 장치, 즉 세이브와 로드 시스템을 통해 유저가 실패를 회피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반복 가능성은 게임의 핵심 재미 요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구조는 인간의 삶과 극명하게 충돌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삶’은 비가역적 흐름이다. 어떤 선택을 했을 때, 그 선택은 되돌릴 수 없으며 그에 따르는 결과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선택함으로써 자신이 되는 존재”라 했고, 그 선택의 총합이 바로 ‘삶의 형식’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실존적 행위는 항상 되돌릴 수 없고, 반복되지 않으며,

자신을 결정짓는 고유한 사건이다.


게임의 세이브 구조는 이 흐름을 기계적으로 끊는다.


유저는 실패했을 때 이전 지점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도할 수 있으며,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선택지를 시험해볼 수도 있다. 이 과정은 유저에게 강한 통제감과 안정감을 주지만, 동시에 실존의 부담과 책임의 무게를 철저히 회피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Fire Emblem: Three Houses에서는 캐릭터의 죽음이 서사적으로 큰 비극이지만, 클래식 모드를 선택하지 않는 이상 실제로는 언제든 로드해서 죽음을 무효화할 수 있다. 이는 플레이어가 선택에 책임지기보다는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는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할수록, 선택은 ‘결정’이 아니라 시뮬레이션으로 변질된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인간은 반복 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매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결정 앞에 서 있으며, 그 결정은 실수일 수도 있고, 고통일 수도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형성하는 유일한 계기다.


게임의 세이브/로드 시스템은 이 과정을 유보시키는 기계다. 우리는 죽음을 진짜로 겪지 않으며, 실패를 기억하지 않고, 결과의 무게를 견디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삶의 감각을 유예당한 상태에서 기술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적 질문이 따라온다.


게임은 반드시 삶처럼 작동해야 하는가?


세이브가 존재한다고 해서 실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가?


반복은 자기기만인가, 실존의 연습인가?


게임의 세계는 반복 위에 세워져 있다.


우리는 죽고, 다시 시작하고, 또 실패하고, 다시 도전한다. 이 과정은 종종 유저에게 ‘성장’과 ‘숙련’을 선사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 이 반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반복은 인간 존재에 속할 수 없는 환상이며, 되풀이되는 선택은 책임을 무디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 이유를 반복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선택은 한 번 일어나고, 그 순간은 지나가며, 그 결과는 삶에 흔적으로 남는다.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시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이러한 실존적 조건을 기술적으로 지워버리는 행위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동시에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을 재정의하고 결단의 순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능동적 반복도 상상한다. 이때 반복은 도피가 아니라 실존의 훈련이 된다. 그 차이는 단 하나, “내가 이 반복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있다.


게임에서도 이 구조는 유저의 태도에 따라 실존과 자기기만 사이를 오간다. 예컨대, Outer Wilds는 게임이 자체적으로 타임루프를 구조화한 사례다. 약 20분마다 세계가 멸망하며, 그 이전에 경험한 모든 지식만이 다음 루프에 영향을 미친다. 로드나 세이브는 존재하지 않으며, 게임은 오직 내가 축적한 이해만으로 진행된다. 이 반복은 ‘실수를 되돌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구성해나가는 과정의 반복이다.


단순한 재시도가 아니라, 내가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조정하는 실존적 실천이다.


반면, 대부분의 게임에서 반복은 ‘최적화’, ‘최단 루트’, ‘가장 좋은 결과’라는 수치적 기준에 따라 설계된다. 이 구조 속에서 유저는 실패를 경험하지 않고 회피하려 하며, 모든 플레이는 ‘정답’을 향한 탐색으로 축소된다. 그 과정은 선택을 결정이 아닌 시뮬레이션으로 만들고, 책임은 시스템 바깥으로 유실된다.


실존주의의 시선은 여기에 비판적으로 들어선다. "당신은 지금 그 선택을 했는가? 아니면 최선의 루트를 찾기 위해 실존을 기술적 최적화의 수단으로 축소하고 있는가?"


반복은 실존을 무디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매 순간을 되풀이되지만 고유한 경험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반복은 존재의 연습이 될 수도 있다. 핵심은, 유저가 이 반복을 어떻게 인식하고 책임지는가다. 이것이 반복을 실존의 도피에서 실존의 훈련으로 전환하는 전제 조건이다.


실패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있는가?


게임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실패를 허용하면서도 통제한다. 목숨이 다하면 재시작하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다시 도전한다. 이 구조는 유저에게 도전 욕구와 피드백 루프를 제공하지만, 그만큼 실패에 대한 실질적 결과를 제거해버린다. 게임 속 실패는 일시적이며, 가벼우며,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실패 없는 세계’는 과연 삶의 감각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는가?


실존주의는 실패를 인간 존재의 핵심 조건으로 본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실패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실패 없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간은 정해진 본질 없이 태어나고, 끊임없이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의 실패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불가피한 마찰이다.


실패는 나의 한계를 직면하게 하고, 내가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를 가시화하며, 내가 무엇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게 만든다. 이처럼 실패는 실존의 ‘중심 증상’이며, 오히려 실패 없이 살아간다는 건 실존하지 않는다는 말에 가깝다.


게임이 실패를 반복 가능한 데이터로 만들 때, 우리는 실패를 감각하지 않게 된다. 실패가 진짜 실패가 아니라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자기 반성, 책임, 결정도 사라진다. 이것은 실존의 윤리와 충돌한다.


하지만 반대로, 실패를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게임도 있다. Outer Wilds를 다시 예로 들자면, 이 게임의 실패는 죽음으로 이어지며, 그 죽음은 시스템적으로 되돌릴 수 없다. 유저는 실패한 경로를 기억하고, 그 실패가 던지는 우주에 대한 질문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을 다음 루프에 지닌 채 진지하게 재도전해야 한다. 실패는 서사적으로도 기능하며, 유저의 지식과 정체성의 일부로 통합된다.


실존주의는 말한다.


실패는 제거하거나 무력화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요소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변한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자신을 시험받는다. 그리고 우리는 실패를 통해 진짜 의미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게임이 이 실패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그 게임이 실존적 공간이 될 수 있는지의 여부와 맞닿아 있다. 실패가 없다면, 유저는 성장하지 않는다.


성장하지 않는 존재는 실존하지 않는다.


반복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리트라이(Retry)는 게임의 핵심 기능 중 하나다.


죽거나 실패했을 때, 그 자리에서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구조. 이 시스템은 유저에게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을 가능하게 해주며, 게임을 실패에 덜 민감한 공간으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리트라이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은유하는 구조가 될 수 있다.


리트라이는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것은 실패의 결과를 지연시킬 뿐, 궁극적으로 유저가 자기 선택에 대해 무감각해질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의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동의 윤리적 무게를 점점 더 경시하게 된다.


이는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자기기만(Bad Faith)’과 깊이 연결된다.


사르트르는 자기기만을 “자유로운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회피하려 할 때”라고 정의했다. 즉, 우리는 반복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진짜 결단과 진짜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나는 진심이 아니었어’, ‘그냥 해본 거야’, ‘어차피 다시 할 수 있으니까’. 이 말들 속에서 유저는 자신이 게임 안에서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것을 멈춘다.


하지만, 실존주의는 모든 반복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그 반복을 어떤 태도로 살아내는가다. 니체는 ‘영원회귀’ 개념을 통해 삶이 끝없이 반복된다면, 그 삶을 동일하게 다시 살아낼 수 있을 만큼 진정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게임 속 리트라이도 마찬가지다.


그 반복 속에서 내가 한 행동이 진짜 나의 결정이었는지, 다시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인지, 그 물음을 스스로 던지고 응답할 수 있다면, 리트라이는 도피가 아니라 윤리적 성찰의 공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


실존은 시스템의 바깥이 아니라 태도 속에 있다


우리는 게임에서 선택하고, 실패하고, 반복한다.


그리고 그 구조는 유저를 ‘진짜 자유로운 존재’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실존주의는 말한다. 자유는 반복 속에 있지 않다. 책임을 지는 태도 안에 있다.


세이브가 있든, 없든. 반복이 가능하든, 아니든. 실존은 오직 하나의 질문을 통해 드러난다. “이 선택은 내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 결과를 살아갈 수 있는가?”


게임은 실존을 대체할 수 없다.


하지만 게임은 실존의 조건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뮬레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적으로 유저의 몫이다. 게임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자유는, 정답 없는 세계 속에서 나만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훈련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게임이 실존주의와 만날 수 있는 지점이고, 그 만남은 반복이 아니라 결단과 책임의 의식으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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