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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을 묻어버리는 살아있는 사람들

- 경남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무덤의 축조 공정에 대한 고찰 -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4단계 BK21

동아시아 SAP 융합 인재 양성 사업팀

임명섭 (석사과정, 참여대학원생) 



  고고학에서 무덤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주로 무덤의 주인공인 피장자의 입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필자는 무덤에 대하여 연구를 하면서 문득 든 생각이 죽은 사람을 묻어버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이 무덤을 축조할 때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만들었을까? 고인돌 상석(上石)의 무게가 약 350t이나 되는 김해 구산동지석묘의 주인공은 과연 사회적으로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길래, 그렇게나 큰 규모의 무덤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 글에서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회에서 조영된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복원해보고, 그 의미에 대하여 피장자가 아닌 조연의 관점에서 살펴보고 생각해보고자 한다.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

  무덤의 종류에 따라서 축조 과정은 상이하다. 이 글에서는 2,000년 전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잘 알려졌다고 생각하는 창원 다호리유적 1호 무덤의 축조 과정을 복원해보면서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호리 1호 무덤 축조 공정 모식도 (1)  (국립중앙박물관 2012의 유구배치도 일부 수정)


다호리 1호 무덤 축조 공정 모식도 (2)
다호리 1호 무덤 축조 공정 모식도 (3)
다호리 1호 무덤 축조 공정 모식도 (4) (국립중앙박물관 2012의 유구 도면 일부 수정)



창원 다호리유적 주변 유적 배치도 (국립중앙박물관 2012)


  필자는 무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가 바로 (1) 입지 선정이라고 생각한다. 무덤의 입지를 살펴보는 것은 무덤이 속해있는 집단 사회가 살았던 환경적인 요인을 생각해볼 수도 있고, 무덤이 위치한 해발 고도의 경관에 따라서 피장자에 대한 조연들의 신망(信望)을 유추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호리유적의 입지적 조건은 평지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다호리 1호 무덤의 입지는 같은 유적 내에서 다른 무덤들과 비교하였을 때, 크게 특별하지는 않다. 필자가 직접 방위를 8개로 분류하여 촬영한 드론 사진을 통해서 다호리유적의 입지를 한 번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창원 다호리유적 방위별 전체 경관 사진 (1) (필자 촬영)
창원 다호리유적 방위별 전체 경관 사진 (2) (필자 촬영)

  2,000년 전의 한반도 남부의 무덤은 토광묘(土壙墓), 목관묘(木棺墓), 목곽묘(木槨墓), 옹관묘(甕棺墓) 등이 있다. 시신이 들어갈 공간 시설의 재질(材質)에 따라서 이름을 붙인 것들이다. 다호리 1호 무덤은 통나무로 관을 만들어서 설치하였기에, 목관묘에 해당한다. 


  무덤이 위치할 자리가 정해졌으면, 땅을 파서 내려가고 그 안에 관을 설치한다. 그 당시에 관(棺)이라는 시설의 존재는 원재료인 나무를 가공하는 기술이 상당히 어려웠기 때문에, 일부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전유물일 가능성이 고고학적으로 존재한다. 


  (3) 요갱설치, (4) 목관 하관, (5) 관 외부 충전의 과정에서 주로 유물이라고 알려져 있는 부장품들을 넣는다. 부장되는 유물은 살아생전 피장자가 소유한 물건일 수도 있고, 무덤을 조영한 집단의 사회적인 성격, 쉽게 말하면 그 사회 내에서 주로 유행했던 물건들이 부장될 수도 있다. 


  중국제 수입품인 청동 거울과 동전, 칠 부채, 다양한 토기 등이 다호리 1호 무덤 내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요갱(腰坑)이라는 시설의 존재가 주목된다. 요갱은 다량의 유물을 부장하기 위한 별도의 시설이라고 할 수 있다. 요갱과 같은 시설은 경남에서는 김해와 밀양의 극히 일부에서만 발견되는 특이한 구조이다. 필자는 이런 요갱의 존재가 일부에서만 발견되는 만큼 ‘무덤을 조영한 집단 간의 모종의 관념적인 공유와 같은 관계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고고학적으로는 문화의 전파나 인간들의 이주 등과 같은 해석으로 연결하는 연구자들도 많이 있다. 다만 필자의 생각과 같이 요갱과 같은 한 가지 조건으로 단순하게 이같은 해석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만, 이들 유적 간의 관계 속에서는 다른 공통된 고고학적 양상들도 다양하게 확인된다. 이에 필자의 생각도 고려해 볼 수 있는 재밌는 상상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과정에 거쳐서 관을 설치하고 유물을 부장하였으면, 무덤을 보이지 않고 밀봉하는 것으로 무덤의 축조 과정은 마무리된다. 이때 현대의 무덤과는 다소 다른 구조의 특징도 눈여겨볼 만하다. 바로 봉분의 존재이다. 당시의 무덤에서는 봉분이 과연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삼국시대에서 등장하는 고총고분(高塚古墳) 이전의 단계에서는 봉분이 없거나, 있더라도 낮은 높이의 봉분이 무덤에 존재했을 것이다. 

  아무튼 다호리 1호 무덤에서는 봉분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기에 현재로서는 봉분이 없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호리 1호 무덤의 입지적 조건이 평지이기에, 지상에 노출되는 봉분의 구조는 각종 자연환경과 개발 등의 인위적인 사건들로 인하여 유실되었을 가능성도 당연히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무덤을 보이지 않게 밀봉하는 것의 의미에 대하여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당연스럽게도 비어진 땅을 매립(埋立)하는 것이 이치일 수도 있다. 그것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필자도 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고고학은 물질 자료에서 보이는 흔적 하나하나를 그냥 놓치지 않고 생각해보는 것이 기본이라고 배웠다. 그렇기에 필자가 생각해 본 무덤을 매립하여 밀봉하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가장 현실적인 생각은 시신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봉분의 존재 유무와 마찬가지로 지상에 노출될수록 유실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시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덤을 밀봉했다는 것이다. 산 자(生者)와 죽은 자(死者)의 관계는 무덤의 밀봉을 통하여 현실에서는 단절될 것이다. 그러나 무덤의 축조 과정에서도 다양한 관념적인 요소를 조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듯이 사후의 산 자(生者)와 죽은 자(死者)는 다른 요소들에 의하여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은 기존에 무덤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인 무덤의 주인공인 피장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무덤을 직접적으로 축조하는 조연들이 가지는 생각들을 필자가 추정해보면서 작성하였다. 한정된 자료이지만 근거를 가지고 다양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는 것은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어보고 있는 여러분들도 한 번 필자와 같이 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다양한 생각을 해보면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 참고문헌 

이원태, 2021, 「원삼국시대 목관묘의 축조와 매장방식 접근」, 『야외고고학』 41, 한국매장문화재협회

이창희, 2016, 「변한사회의 중심지이동론 - 다호리집단의 이주와 김해지역의 성장 -」, 『영남고고학보』 76, 영남고고학회

이창희, 2022, 「삼한시기 고 김해만 國의 형성과정」, 『2022 해남 군곡리패총 국제학술대회』, 목포대학교박물관

정현진, 2019, 「매장의례로 본 변한지역 목관묘의 토기 부장 양상과 그 특징」, 『2019년 가야학술제전–삼한의 신앙과 의례』, 국립김해박물관

매튜 존슨(Matthew Johnson), 오세연 역, 2015, 『경관고고학』, 사회평론

마이크 파커 피어슨, 이희준 역, 2010, 『죽음의 고고학』,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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