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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의 경계가 사라지는 지붕, 청기와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4단계 BK21

동아시아 SAP 융합 인재 양성 사업팀

권태하 (석사과정, 참여대학원생) 



청와대 (필자촬영)

  2022년 5월 10일 국민에게 개방된 청와대(靑瓦臺)의 이름 뜻을 아시나요? 푸를 청(靑) 기와 와(瓦)를 사용하여 ‘푸른 기와집’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푸른색의 기와는 아주 예전부터 사용되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나요?


  일반적인 검정색의 기와보다는 흔하지는 않지만 청와대로 인해 익숙한 푸른색* 의 기와를 보통 청기와(靑瓦)라고 부릅니다. 청와대의 모습으로 인해 현대에 만들어진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푸른색의 기와들은 삼국시대를 시작으로 통일신라, 고려, 조선까지 꽤 긴 시간을 지붕 위에 있었습니다. 삼국, 통일신라시대의 녹유와, 고려의 청자기와, 조선의 청기와가 대표적인 푸른 기와인데 이들의 제작방식과 유약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푸른색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이 많은 푸른색 기와 중 조선시대 청기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푸르다’는 초록색, 파란색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색상 스펙트럼을 가집니다. 하지만 본 글에서는 특정 색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그 스펙트럼을 모두 포괄하여 사용합니다.




조선의 청기와


창덕궁 선정전 (필자 촬영)

  현재 조선시대 청기와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창덕궁 선정전입니다. 


기록① “우리나라에서는 다만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에만 청기와를 덮었을 뿐이고, ...”

『문종실록』1권 문종 즉위년(1450년) 2월 28일


기록②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은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를 이은 것이 많은데, 하물며 왕의 정전(正殿)이랴. 그러나 청기와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금년부터 해마다 구워 만들어 정전만은 으레 청기와로 이도록 하라."

『연산군일기』60권, 연산11년(1505년) 11월 6일


기록③ "인경궁의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을 장차 푸른 기와로 덮고 근정전(勤政殿)의 예에 따라 단청에 쓰는 진한 채색으로 칠하려 하니 특별히 더 자세히 살펴 아뢰도록 하라.“

『광해군일기』60권, 광해10년(1618년) 4월 4일


  위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에는 궁내 건물에 청기와가 올라갔다는 기사가 다수 눈에 띕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비롯하여 인정전, 홍정전 등의 기사가 남아있으나(기록①,②,③) 현재까지 남은 건물은 선정전뿐입니다. 청기와를 다시 제작하여 지붕에 올리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첫 번째로는 염초입니다. 청기와의 푸른색을 만들기 위해서 유약, 염초(焰硝, 질산칼륨KNO3)라고 불리는 재료가 필요합니다. 이 중 염초는 청기와 제작을 위한 점토를 만들 때 흙과 함께 섞어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염초는 일단 만들기가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빛이 검고 매운맛이 나는 특수한 토양에 쑥재와 곡식대제 및 물을 섞어 끓여 만드는데 이것도 만드는 자의 솜씨에 따라 성능이 달라질 만큼 만드는 것이 어려운 물건이었습니다(허태구, 2002 ; 손신영, 2012). 고려시대부터 군수물자인 화약의 재료로 이용되는데 세종 대 당염초(唐焰硝) 시험 제작 성공 전까지 큰 비용이 들었습니다. 즉, 청기와의 원료 중 하나인 염초는 청기와의 제작비용을 높여 재정적인 문제를 초래하였고, 쉽게 제작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손신영(2010)에 따르면 조선 사람들의 부정적 인식도 원인입니다. 백자에서 볼 수 있듯이 당대인들은 절제된 미, 검소함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청기와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다수의 노동력과 고비용이 드는 점에서 부정적 인식이 강하였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인식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청기와(기사 내에서는 청와靑瓦, 기록④)’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세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록④ “ 허후가 또 아뢰기를, "근일 청와(靑瓦)를 구워 만들려고 선군(船軍)을 징발하였다 하옵는데, 신은 생각하옵기를, 근정전(勤政殿)은 이미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 되어 있으므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좋을 것이오나, 대내의 침전(寢殿) 등의 여러 궁전이야 기와를 고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또 청와는 노력과 비용이 적지 않게 들고 염초(焰硝)로 만드는 것이온데, 염초는 곧 군수(軍需) 물자이며 달이기도 몹시 어려운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생각하옵기를, 이 역시 할 필요가 없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하니, 임금은 묵연(默然)한 채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세종실록』81권, 세종20년(1483) 4월 15일


  하지만 청기와 제작의 중단은 위의 두 가지 근거와 함께 제작 기술의 단절이 가장 주요한 이유입니다. 청기와는 염초의 수급, 재정 문제, 그리고 인식의 문제로 여러 난관에 부딪히나 조선 전기 기록을 보면 꾸준히 제작하여 지붕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광해군대 청기와를 굽는 법이 난리 이후 사라졌다는 기록(기록⑤), 정조대 선정전에 비가 새지만 새로운 기와를 올릴 수 없다는 기록이 확인됩니다(기록⑥). 이는 청기와 제작 기술이 단절됐다는 문헌적 자료이며 기술이 단절된 시기는 임진왜란 때로 추정됩니다.


기록⑤ "홍정전(弘政殿)과 광정전(光政殿)의 청와(靑瓦)와 잡상(雜象) 가운데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곳이 있습니다. 청황와(靑黃瓦)를 굽는 법은 난리를 겪은 뒤 그 진방(眞方, 참다운 방법)을 잃어 버렸는데, 지난날 유일하게 박용수(朴龍守)가 어렸을 때 보고 들은 것을 주워 모아 만들었지만 그래도 원래 방법을 터득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용수가 죽은 뒤로 새로 배운 사람들은 더욱 그 방법에 익숙하지 못해서 한갓 허다한 재료만을 허비하면서 겨우 모양만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추위가 극심한 날을 당해 비와 눈마저 스며든다면 청색이 벗겨질 걱정이 있는데, 이와 같이 계속된다면 마침내는 모조리 변해서 적색이 되어버리고 청색은 없어지게 될 것이니, 매우 걱정입니다. 이것이 비록 낭청과 감조관 등이 감조를 삼가지 않은 죄는 아닙니다만, 전각의 지붕에 일이 생긴 데에 관계되니 체면이 중대합니다. 번와소(燔瓦所, 기와를 구워서 만드는 곳)의 낭청과 감역관을 아울러 추고하고, 청와를 굽는 편수 장인(編首匠人)을 가두어 죄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광해군일기』 광해10년 11월 4일


기록⑥ “선정전(宣政殿)의 청기와에 비가 새는 곳이 있는데, 공인(工人)이 죽은 뒤에 제조 기술을 배워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영부사(領府事)가 지난번 연경에 들어갔을 때 제조 기술을 구하였으나 구하지 못하였다.”

『일성록』 정조8년 3월 4일


  특히 이 기술 단절에 대한 고고학적 근거로는 새로운 제작방식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청암키와는 통권작법(桶捲作法)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에서도 암키와를 만들 때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와통(瓦桶)을 이용해 한꺼번에 4장의 기와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해군과 고종대 건물에서 나타난 청기와는 1매작법의 형태가 보입니다. 1매작법은 통권작법과 달리 큰 판 위에 점토판을 놓고 기와 1장을 만드는 방식으로 기와 제작 흔적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광해군대 건물에서 보이는 1매작법 기와는 당대 중국에서 유행하던 궁 전용 유리와(琉璃瓦) 제작법으로 청기와 제작기술이 끊기자 중국에서 배워와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이인숙, 2012). 하지만 이러한 기술도 제대로 들여오지 못하였음을 고종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기록⑦)


기록⑦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채색 기와가 있었으며 보통 기와보다 훨씬 나았다. 후세에는 그것을 만드는 법을 모르게 되었으니 매우 통탄스럽다. 전에 영건도감이 때때로 채색 기와를 만든다고 하였는데, 끝내 그 법을 해득하지 못하였는가?”

『승정원일기』 고종 11년 5월 12일

좌) 암키와 제작 방식 (김성구, 1992) 우) 1매작법에 필요한 도구 (출처 京都府山成鄕土資料館)



  현재 경복궁에는 청기와가 올려진 건물이 없지만 1990년대부터 시행된 경복궁 발굴조사사업을 통해 침전지, 훈국군영직소지, 소주방지, 흥복전지, 함화당・집경당 행각지, 광화문 동・서 궁장지, 용성문지 하부 선대 대형건물지에서 청기와가 출토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기록상에서만 청기와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 건물에서도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경복궁 자미당(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2022)에서는 다량의 청기와가 발견되었는데 특히 지붕에 올려지는 기와의 모든 종류가 발굴되어 청기와가 실제로 경복궁의 지붕에 올려졌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고고학적 근거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사진은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처럼 근정전이 여전히 청기와였다면 어떠했을지 상상하며 만든 사진입니다. 향후 발굴조사로 인해 청기와 건물의 복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 참고문헌 

손신영, 2010, 「조선시대 청기와에 대한 인식과 실재」, 『강좌미술사』 35, 한국불교미술사학회

이인숙, 2012, 「경복궁 출토 청기와의 제작 시기 및 사용 건물 검토」, 『고고학』 3, 중부고고학회

허태구, 2002, 「17세기 조선의 염초무역과 화약제조법 발달」, 『韓國史論』 4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국립문화재연구원 유튜브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 X 심용환  “경복궁 자미당 이야기”https://youtu.be/4kcek6eo4tc

김성구, 1992, 『옛기와』, 대원사

『朝鮮王朝實錄』 (https://sillok.history.go.kr/)

『승정원일기』 (https://sjw.history.go.kr/)

『일성록』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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