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세계를 품은 존재 인간
인간은 참으로 묘한 존재다. 지구상에 수많은 생명체가 있지만, 우리는 흔히 인간을 ‘지배종’이라 부르며 특별한 위치를 부여한다. 그 근거로 가장 자주 거론되는 것은 지능이다. 그러나 지능만으로 인간의 고유성을 설명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능은 절대적이지 않다. 원숭이는 눈앞의 정보를 사진처럼 저장해 단기 기억 과제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 까마귀는 도구를 만들고, 문어나 코끼리는 문제를 풀고 협력하며 살아간다. 우리가 그들의 내면을 언어로 확인하지 못할 뿐, 그 지적 세계를 얕잡아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다른 차원의 표지가 있다. 바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단순히 즐겁고 이익이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상황에 관계없이 지켜야만 하는 도덕적 명령이 우리 내면에 자리한다. 기독교는 이를 양심과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르고, 칸트는 정언명령이라 불렀다. “네 행위의 준칙이 동시에 보편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행하라.” 인간은 이렇게 자신에게 법을 세우고, 그 법 앞에 스스로를 세울 수 있는 존재다.
여기에는 두 질서가 함께 작동한다.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의 육체와 욕망, 행동은 인과 관계의 사슬에 묶여 있다. 다른 하나는 도덕의 법칙이다. 인간은 설명을 넘어 정당화를 요구받는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단순한 사실의 존재가 아니라 책임지는 존재가 된다.
칸트는 이를 현상과 사물자체의 구도로 설명했다. 현상 세계에서 우리는 원인과 결과로 설명된다. 그러나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유를 전제하지 않고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칸트는 자유와 더불어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실천 이성의 가정으로 두었다. 그것들은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도덕 실천을 가능하게 해 주는 나침반이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면, 육체의 소욕과 말씀의 요구가 인간 내면에서 늘 부딪힌다. 철학의 언어로 말하면, 자연의 설명과 도덕의 당위가 긴장한다. 인간은 바로 그 사이에 선 존재다. 한편으로는 자연의 일부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 법을 세우고 책임을 지는 도덕적 존재다.
이 이중성은 인간을 위대하게도, 애처롭게도 만든다. 자유를 향한 고귀한 결단을 내릴 수 있지만, 욕망 앞에 무너지는 나약함도 안고 있다. 그러나 그 간극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진다. 계산 능력이 아니라, 욕망을 제어하고 보편적 원칙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의 존엄이다.
나는 인간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자연의 법칙 속에 살면서도, 양심의 부름 앞에 서야 하는 존재. 그 틈에서 우리는 성숙을 배우고, 성숙 속에서 참된 자유를 향해 나아간다. 지능은 도구일 뿐이다. 양심이야말로 방향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결국 이익이 아니라 의무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