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 개인적 관점에서 사유해 보고자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종교인이나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영혼 개념에 회의적이었다. 경험을 통해 직관할 수 없는 실체에 대해선 “존재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곧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존재를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칸트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시간·공간·인과라는 선험적 형식을 통해 주관적으로 재구성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을 하나로 묶는 것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초월적 통각이다. 영혼을 실체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이러한 형식적 조건은 마치 영혼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 지점을 나의 신앙 언어로 해석한다. 영혼은 빛을 담는 그릇과 같다.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영을 받아 투영한다. 마치 투명한 유리가 외부의 빛을 받아 세상을 비추듯, 영혼은 하나님의 빛을 받아들이고 반사하는 존재다. 적극적으로 무엇을 창조하기보다, 받아들이고 드러내는 자리라는 점에서 영혼은 수동적이면서도 결정적이다.
심리학적 관점에서도 영혼은 무의미하지 않다. 기뻤던 나, 슬펐던 나, 분노했던 나는 모두 다른 순간이지만, 결국 하나의 ‘나’로 경험된다. 이 연속성과 통일성은 단순한 감정의 합이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주체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심리학도 경험을 일관되게 묶는 중심을 가정할 수밖에 없으며, 전통적으로 이를 영혼이라 불러 왔다.
영혼이 육체의 소멸 뒤에도 존속하는지는 이론으로 규명할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도덕적 실천을 위해 영혼의 불멸을 실천적 가정으로 받아들였다. 신앙의 언어로 말하자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나에게는 이 믿음이 양심의 소리, 책임감,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 속에서 확인된다.
결국 영혼은 관계의 자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을 인식하고, 세상을 받아들이며, 타인을 통해 나를 배우는 통로가 영혼이다. 과학은 그 과정을 신경의 작용으로 설명하고, 철학은 경험을 가능케 하는 형식을 분석하며, 신앙은 그 빛의 근원을 고백한다. 서로 다른 길이지만, 셋은 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든다.
나는 영혼이 실체인지, 기능인지, 틀인지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덕분에 내가 세계를 경험하고, 양심을 듣고, 선을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 자리에 감사한다. 그리고 이 감사 속에서 내 신앙을 고백하며, 삶을 회의적으로가 아니라 희망적으로 살아가려 한다. 과학이 준 명료함, 철학이 가르친 겸손, 신앙이 주는 위로를 붙들며, 오늘도 내 영혼이라는 그릇이 조금 더 투명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