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도 정신이 잠들지 못할 때가 있다.
뇌는 끝없이 정보를 처리하며 스스로를 소모시키고,
마음은 격랑치는 파도처럼 요동친다.
도파민의 과잉 분비로 의식은 지나치게 깨어 있으나,
그 각성은 집중이 아니라 불안한 흥분으로 이어진다.
이때 나는 묻는다.
“이 각성의 시간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상태는 하루 주기 속에서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이 시간을 어떻게 건너는가가 정신적 성숙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더 강한 자극을 찾는다.
술, 담배, 자극적인 콘텐츠, 폭식이나 무의미한 대화로
잠시의 공허를 덮는다.
그러나 그 회피는 고통을 줄이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은 피로와 무기력으로 이끈다.
자극은 고요를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정반대의 길을 택한다.
모든 활동을 멈추고, 의도적으로 고요 속으로 내려간다.
호흡을 고르고, 떠오르는 생각을 억누르지 않고
그저 흘려보낸다.
때로는 짧은 산책을 나선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
이 작은 감각들이 과열된 의식을 현실로 불러낸다.
집안일을 정리하거나 먼지를 닦는 일도 도움이 된다.
작은 질서가 외부에 생기면,
그 질서가 마음 안에도 번져 들어온다.
이 과정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영적 수련의 일환이다.
과도한 각성의 순간은 인간이 가진 불안의 근원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그 순간, 우리는 더 많은 자극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우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스피노자는 이를 정서의 자유라 불렀고,
동양의 철학자들은 경(敬)이라 말했다.
불교는 선(禪)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기독교는 기도를 통해 내면의 질서를 회복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킨다.
혼란의 중심에서 다시 평정을 세우는 인간의 의지.
나는 각성의 밤이 찾아올 때마다
한 줄의 짧은 기도를 드린다.
“주님, 지금 이 혼란이 지나가게 하소서.
제 마음을 맑히시고, 고요 속에서 새 힘을 주소서.”
이 기도는 단지 신에게 바라는 말이 아니다.
혼란한 의식이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이자 선언이다.
그 한 문장이 내면의 소음을 멈추고,
지친 정신에 잠시 숨 쉴 공간을 열어 준다.
완전한 평정은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불완전 속에서도 평정을 지향하는 노력,
그 되풀이되는 연습이야말로
인간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격랑은 언제나 찾아온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법,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워야 할 삶의 기술이다.
오늘 밤도 나는 그 연습을 한다.
각성의 불길 속에서, 다시 고요로 돌아오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