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나는 실존주의 철학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존재의 개인적 측면, 자유로운 선택,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삶의 방식이 나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한국 사회가 전통적으로 가족과 가문, 집단의 질서를 우선하는 문화권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나를 더욱 개인 중심의 사유로 밀어 넣었다.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개인이 희미해지는 현실이 불편했고, 형식만 남은 전통과 관습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자유를 강조했다. 자유에 근거한 선택, 선택에 대한 책임, 그리고 남과는 다른 삶의 결을 만드는 일.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여러 고전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다른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동체와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하지 않는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 사고의 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심지어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까지도 이미 형성된 문화와 관계 속에서 배운 것이다. 인간은 홀로 완성된 개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누군가의 품에 안기고, 일정 기간 보호받으며,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신을 형성해 간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층위에는 인류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보편적 가치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내가 속한 민족과 국가의 정신이 얹혀 있고, 더 좁게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가정과 지역의 문화가 더해진다. 나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여러 겹의 역사와 관계가 겹쳐진 결과물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아무리 고상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검증되지 않는다면 현실과는 거리가 먼 탁상공론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을. 사상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 정의, 관용, 책임과 같은 개념들은 관계 속에서만 실효성을 가진다. 혼자서는 용서를 실천할 수 없고, 혼자서는 인내를 훈련할 수 없다.
인간은 논리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감정에 흔들리고, 때로는 자기중심적이며, 일관되지 않다. 어제의 확신이 오늘의 의심으로 바뀌고, 단호했던 결심이 작은 자극 앞에서 무너진다. 한 인간의 말과 행동에 완벽한 합리적 근거를 찾으려 한다면 쉽게 지치게 된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는 이해가 인간을 이해하는 더 성숙한 태도일지 모른다.
이러한 통찰은 나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존재를 개인의 영역 안에서 완성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해 가는 존재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다. 대화와 타협, 협력과 인내는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존재를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삶을 떠올린다. 십자가는 철저히 관계적 사건이었다. 사랑, 희생, 용서, 관용, 인내와 같은 덕목은 고립된 공간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타인을 향해 열려 있을 때에만 그 가치는 살아 움직인다. 그러므로 공동체는 나의 신앙을 시험하는 공간이자, 동시에 나를 성장시키는 훈련장이 된다.
나는 뛰어난 시민이 되고 싶다. 어떤 성향과 배경을 가진 사람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람.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중심적 충동에 휘둘리지 않으며, 타인을 이해하려 애쓰는 사람.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참되게 존재하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이제 나는 안다. 자유는 관계를 부정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책임을 감당할 때 성숙해진다는 것을. 개인은 공동체를 통해 형성되고, 공동체는 개인의 성숙을 통해 건강해진다. 둘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필요로 하는 두 축이다.
나는 여전히 나로서 존재하고 싶다. 그러나 그 ‘나’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타인과 함께 형성되어 가는 존재다. 관계 속에서 배우고, 관계 속에서 상처받고, 관계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존재. 그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를 배우며, 인내를 훈련하는 존재.
그것이 내가 도달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