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타인을 비판한다.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잘못을 따지고,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 비판의 칼날을 들기 전, 우리는 자신에게 묻고 있는가. 과연 나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식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기준 삼아 남을 재단하는가.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는 때가 있다. 그것은 종종 남을 비판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 놀랍게도, 그 깨달음은 신앙적으로는 축복이며, 인간적으로는 용기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3) 이 구절은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교만과 자기기만을 꿰뚫는 깊은 경고다.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남을 비판하고, 이토록 어렵게 자신을 성찰하는가? 첫째로, 인간은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자기 방어기제를 작동시킨다. 자신의 실수를 마주하는 일은 자아를 위협하는 일이며, 고통스럽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그 고통을 피하려 한다. 하지만 윤리적, 도덕적, 영적 성숙은 바로 그 불편함을 직면하고 인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통을 감수하는 자기 성찰, 그것이 실존적 의미에서의 회개다.
나는 기독교인이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이해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생기는 오류를 경계한다. 마음이 편안한가 아닌가로 모든 영적 상태를 판단하려는 경향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판단 기준이다. 진리는 때로 불편하며, 성장은 흔히 고통을 동반한다. 불편함을 회피하는 자세는 결국 삶을 비겁하게 만든다. 작은 용기만 있었어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 망설임과 미루기로 인해 무겁고 거대한 벽이 되기도 한다.
둘째, 우리는 비판을 통해 상대적 우월감을 획득하려 한다. 사회 속에서 타인의 부족함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 존재 가치를 정당화한다. 특히 상위 위치에 있는 자일수록, 하위자에 대한 비판을 정의로 포장한 채 스스로를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아무리 정당해 보이는 지적일지라도, 그 안에 교만이 섞여 있다면 진실한 회개로 이어질 수 없다.
셋째로는 프로이트가 말한 ‘투사’의 심리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와 직면하는 대신, 타인의 모습 속에 그것을 비추어본다. 게으른 사람이 남의 게으름을 견디지 못하고, 불안한 사람이 타인의 흔들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이는 자기 자신을 향한 눈길을 외부로 돌리는 심리적 회피다.
넷째로는 ‘귀인 오류’가 있다. 우리는 자신의 실수를 상황 탓으로 돌리면서, 타인의 실수는 그 사람의 본성과 성격 탓으로 치부한다. 나의 분노는 "스트레스를 받아서"라고 말하며 정당화하지만, 남의 분노는 "인성이 나빠서"라고 판단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타인에게는 가혹하다. 정의의 기준이 왜곡될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정직함이다.
이쯤에서 나는 문득, 검찰이라는 제도를 떠올린다. 법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에 따라 잣대를 다르게 적용하는 이중성이야말로 우리가 비판해 왔던 대상이 아닌가?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행태를 나 자신도 일상에서 반복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이다. 남을 향한 비판 속에 숨겨진 내면의 위선. 이것은 부끄러우나 깊은 통찰이다.
다섯째는 인간의 지각 능력의 한계다. 우리는 외부의 사물과 타인의 행동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만, 자기 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은 어렵다. 자신의 결점은 흐릿하게 보이고, 타인의 결점은 선명하게 보인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인식의 근본적 불균형이다.
결국, 우리가 휘두르는 비판의 대부분은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일 수 있다. 진정한 회개란,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자신의 어두움을 인정하고,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삶의 실천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다. 비판하는 자여, 먼저 신 앞에 나아가 회개의 마음을 품어라.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타인을 향해 손가락을 들라. 그것이 인간으로서, 신 앞에서의 정직함이며, 내가 오늘 나에게 주는 한 줄의 지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