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존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내가 누구인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실존주의가 말하는 진정한 인간의 길이며, 내가 지향하는 삶의 모습이다.
실존주의 철학은 인간을 ‘이미 정해진 본질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은 먼저 존재하고, 이후에 스스로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존재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를 “기투(projection)”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대자존재는 스스로가 되고자 하는 존재상을 마음속에 그리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기획하며 나아간다. 나는 그 사유에 깊이 공감한다. 나 역시 이상적인 나의 모습을 상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끊임없는 시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물론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윤리적, 도덕적으로 다듬어가며 성장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완전하고 고결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그것을 초월자 혹은 ‘신’에 가까운 이상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육체적 힘이나 초능력을 의미하기보다는, 윤리적 순수성, 도덕적 정직함, 그리고 지적인 성찰 능력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이러한 나의 이상적 자아는 단지 상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실제로 그러한 자아를 구현하기 위해 매일 삶 속에서 작은 선택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실존은 고정된 정체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는 강과 같은 존재 방식이다. 방향을 잃지 않은 흐름이 결국 강의 이름이 되듯, 인간도 자신의 실존적 선택의 방향이 곧 ‘나는 누구인가’를 정의하게 된다.
그러기에 나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감정을 품고, 어떤 시선을 갖고 살아갈지를 정하는 것—이 모든 것이 실존의 결정적 기점이다. 외부 조건이 아무리 불리해도, 나의 내면을 어떤 것들로 채울지는 오로지 나의 자유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자유’라는 개념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외부로부터 강요되거나, 내 사고와 감정을 통제하려는 압박을 받을 때, 존재 자체가 위협당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누구도 타인의 존재를 억압하거나, 그 마음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주장이나 기질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근본정신이자 실존적 권리이다.
최근 들어 나는 생각한다. 나의 자유는 단지 행동의 자유만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선택하는 내면의 자유까지 포함된다는 것을. 내가 채택하지 않은 부정적 감정, 윤리적이지 않은 생각, 왜곡된 이미지를 내면에 억지로 들여오는 것은 실존의 침해이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내면에 “NO”라고 말한다. 나의 내면은 내가 선택한 가치로 채워져야 하며, 나는 그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이러한 선택의 자유는 단순한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방향을 정하는 책임이며, 나를 나로 만들어가는 실천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자유롭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며, 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는 진정 실존하는 자가 된다.
내가 꿈꾸는 인간상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윤리적 이상을 지향하며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삶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나의 정신을 고결한 방향으로 기획하며 나아가는 실천자. 그 존재를 향해 나는 오늘도 분투하고 있으며, 그 분투 자체가 곧 나의 실존이다.